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제 각각의 방식의 차이로 소통된다. 긴 연애는 실연이 되었고 갑작스러운 로맨스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현정(문소리)은 실연의 상처에서 달아나듯 상훈(김태우)의 마음으로 도피했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었다고 판단하지만 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눈 가리고 아웅’임을 드러낸다. 현정은 상훈과의 결혼생활에 헌신적이지만 첫 만남 당시의 애틋함은 지속적 일상에서 샘솟는 권태로 희석되고 점차 피해의식마저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민석(이선균)은 봉인된 과거의 그리움을 불쑥 해방시킨다. 풍화되지 못하고 시간에 덮여있던 과거의 연애담은 결혼생활의 권태를 더욱 지겹게 각성시킨다.
현정이 갑작스럽게 결혼을 이루고자 했던 건 실연의 상처에서 기인한 도피욕구이자 충만했던 애정의 결핍이 이간질한 충동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 순간적인 욕구로 메운 욕망의 유효기간이 길리 없다. 정리되지 못하고 위장된 본심은 짧은 세월의 풍화작용만으로도 일시적인 행복의 얕은 밑천이 닳아 없어질 때쯤 다시 본 모습을 드러낸다. 현정은 결국 타성적인 감정에 이끌린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능동적인 태도를 구사하고자 한다. 이별은 민석의 통고에 의한 것이었고 결혼도 상훈의 구애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제 스스로 이별을 고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결심을 도모하는 것도 그녀다. 스스로 자신의 내면적 변화를 주도하고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는 현정의 일련의 과정에서 그녀가 단순히 어느 한 개인으로서가 아닌 여성이라는 전체적 집단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음이 시사된다.
현정은 민석과 상훈에게 각각 사과한다. 그 사과의 어휘는 동일하지만 의미는 반대로 향한다. 민석에게 보내는 사과는 자신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단절을 표방하며 그와 반대로 상훈에게는 스스로 종결하려 했던 상대와 다시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일말의 의지를 전한다. 이는 원래 자신이 먼저 들어야 했던 사과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거나 미처 하지 못한 뒤늦은 대답과도 같다. 갑작스러운 이별통고를 전한 민석의 사과에 뒤늦게 응답함으로써 그 시절에 얻은 상처로부터 완벽히 탈피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거듭남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비윤리적 죄책감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적 미련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로 표방된다. 결국 상훈에게 일련의 사실을 고백하며 남기는 사과는 도피했던 감정이 재정립되어 새롭게 거듭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현정과 상훈, 민석의 삼각구도를 기본골자로 하는 <사과>는 한편으로 현정의 가족을 응시하기도 한다. 명예퇴직으로 돈벌이가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도맡고 있다. 현정의 어머니는 현정이 회사를 그만 두고 상훈을 따라 구미로 내려가겠다고 할 때, 후에 서울로 올라와 출산하고 회사를 다니다 상훈과 이혼하겠다고 선언할 때, 현정에게 집안사정을 언급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듯 현정에게 반대한다. 이는 1세대 가정이 겪는 내부적 진통이 2세대로 옮겨가는 구도로 묘사되는데 실직된 아버지와 회사를 그만두고 실직의 형태로 묘사되는 상훈이 유사하고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어머니는 역시 현정과 유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승적 굴레에서 탈피를 꿈꾸는 현정을 막고 돌려세우는 건 어머니인데 이는 단순히 개인의 피해의식을 뛰어넘어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구성원으로써의 의도로 여겨진다. 결국 그녀가 아버지의 안경을 찾으며 어머니에 대한 책망과 함께 눈물 리는 건 그런 아이러니한 모순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적 방편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단순히 타인의 삶에서 소비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삶을 소비하는 주체적 대상으로써의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각성과도 같다. 결혼이라는 행위가 여성으로써 의무적인 통과의례가 아닌 삶의 수단이 되는 행위이자 중요한 방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는 결국 여자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는다. 단순히 여권의 신장이라는 안티테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통해 깨우쳐야 할 권리적 분위기의 확장을 말이다.
사과란 자신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행위다. 그것은 흔히 상대방과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관계의 결말을 위해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 관계를 종착시키기 위한 선고는 관계 지속에 일정한 간격을 형성시켜 이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벌려나가 종래엔 끊고자 함이다. 사과는 그렇게 관계의 변화를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밀고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제각각 사용된다. <사과>는 사과라는 행위를 통해 변모하는 어느 여성의 심리적 양상을 살피고 그와 함께 변해가는 인식의 상태를 관찰한다. 그 짧은 사과 한마디에 달라진 여인의 삶은 결국 여성의 주체적 삶과 연계된 고민을 제기한다. 남성이 차지한 권위적인 성 역할의 궤도를 배회하던 여성이 주체적으로 그 궤도에 진입하는 변화된 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스스로 고민할만한 과제를 부여한다. 확장된 삶의 기회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과 간과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해 사유한다. 결국 현정의 품 안에서 잠드는 상훈처럼 단절보다는 회유와 용서로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고 지속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능동적인 변화에서 가능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의무가 아닌 권리임을 깨닫는 것. 그 주체로써의 의식의 성장을 말이다. <사과>는 어느 여성의 주체적인 성장통이다.
2008년 9월 30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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