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요정이 공존하던 시절, 인간의 지배적 욕망은 요정계를 자극하고 결국 두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에 맞선 요정계의 왕 발로는 황금으로 만든 불사의 군대, ‘골든 아미(Golden Army)’를 만들어 전투에 투입하고 전장은 살육의 바다가 된다. 요정계의 왕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살육에 대한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골든 아미를 봉인한 뒤, 인간과 불가침 휴전 협정을 맺는다. 유년 시절 헬보이가 들었던 그 동화의 후일담은 결국 헬보이(론 펄먼)가 대면할 현실이 된다. 지옥의 열쇠가 될 운명을 거부한 붉은 악마는 골든 아미를 찾아 떠나는 어드벤처 미션 <헬보이2: 골든 아미>(이하, <헬보이2>)를 통해 본격적인 2차 성징에 돌입한다.
세상을 구원했다는 칭송은 헬보이(론 펄먼)를 심드렁하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캔맥주와 시가, 고양이, 그리고 리즈(셀마 블레어)를 위해 세상을 보전했다고 한다면 모를까. 지옥을 여는 열쇠라는 육중한 오른손과 거칠게 깎아낸 이마의 뿔의 흔적, 붉게 물든 긴 꼬리, 지옥에서 온 헬보이는 자신의 선천적 운명과 후천적 제약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미성숙한 자의식을 지닌 안티히어로다. 헬보이는 선과 악의 패러다임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강요를 거부했을 뿐이다. 첫 번째 강요를 거부한 헬보이에게 현실은 또 다른 강요를 부여한다. 초자연현상연구사무국(BPRD)의 해결사이자 문제아인 헬보이는 자신을 아들처럼 여기던 트레버 브룸 박사(존 허트)가 (전작에서) 죽은 후, 조직의 통제를 따돌리고 노골적으로 일탈을 즐기곤 한다. 그 와중에 리즈와의 갈등도 심해진다.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적이던 헬보이는 TV카메라 앞에 당당히 나타나며 상부에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반항심이 불거진 헬보이 앞에 새로운 적이 등장한다. 골든 아미를 부활시켜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요정족의 누아다 왕자(루크 고스)는 골든 아미를 부활시키려 하고, 이를 위해 골든 아미를 조종하는 황금 왕관 조각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선천적 운명을 거부한 헬보이가 맞서는 상대는 인간의 반대편에 선 요정의 왕자다. 하지만 헬보이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넌 우리와 더 닮았어. 누아다 왕자의 말처럼 헬보이는 자신이 속한 그 세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배척하고 강제하고 있음을 점점 깨닫기 시작한다. <헬보이2>는 인생의 방향을 가늠한 헬보이가 자아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두 번째 시험대다. 콘크리트 벽을 부수던 거대한 숲의 신이 헬보이에게 제압당한 채 아스팔트 위로 녹색잔해를 남길 때 헬보이는 황망한 허탈감을 느낀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임에도 인간은 되려 그를 괴물이라 손가락질하고 상처를 입힌다. 결국 누아다 왕자와의 사투 끝에 골든 아미를 봉인시키는데 성공한 헬보이는 다시 한번 세상을 구하지만 자신을 향한 또 다른 강압적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대립구도의 뒤처리를 맡고 있음을 깨닫는 헬보이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잡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요정과 괴물, 정령과 마수가 공존하는 <헬보이2>의 세계는 크로테스크한 판타지의 욕망이 산재했지만 순수한 동화적 호기심으로 충만하다. 유사한 이미지의 세계관으로 이뤄진 <판의 미로>를 비롯해 시리즈의 전작인 <헬보이>로부터 <헬보이2>의 미장센은 고스란히 연계되고 있으며 <크로노스>와 <미믹>과 같은 초기작들의 몇 가지 설정들이 아기자기하게 동원되어 <헬보이2>를 채운다. <헬보이2>는 독창적이면서도 경이적인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선사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방대한 결산처럼 보인다. 특히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방대하게 전시한 트롤시장의 풍경을 비롯해 후반부에 펼쳐지는 골든 아미의 거대한 행렬은 그 전체적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백미는 도심 한복판에 소환되는 숲의 신과 대결하는 씬인데 이는 자연에 대한 거대한 경의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인간의 파괴적 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만큼 숭고하다.
다만 <헬보이2>는 때때로 산만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누아다 왕자의 골든아미를 저지하는 헬보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주변부에 이목을 끌만한 거리가 적잖아 종종 이야기의 집중력이 흐려진다. 헬보이의 반항과 고뇌를 필두로 에이브(더그 존스)와 누알라 공주(아나 월턴)의 멜로 라인이 형성되고, 새로 등장한 심령술사 요한 크라우스 박사를 비롯한 서브 텍스트들이 곁가지를 치고 저마다 불쑥 자라 맥락의 일관성을 침범한다. 한편으로 <헬보이2>는 전작에 비해 액션의 비중을 키우고 유머의 빈도를 늘림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인 기능성을 구사한다. 볼거리가 많아진 만큼 눈으로 느낄만한 호사로 가득하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동화적인 이야기의 해결방식 역시도 유아적인 뉘앙스를 남기기 때문에 성인이라면 유치하다 느낄 만한 구석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헬보이2>는 분명 순수한 독창적 에너지로 무장한 경이로운 블록버스터다. 기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미술적 양식이 동화적 순수함에서 기반한 세계관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인간은 또 한번 헬보이로 인해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그를 질시한다. 결국 헬보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리즈와 함께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다. 드디어 헬보이의 진짜 운명이 시작된다. 더 이상 인간의 이기심의 방패로서 이용당하지 않는다. 소년은 그렇게 질풍노도를 뛰어넘으며 진짜 남자가 된다. 여전히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해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헬보이는 또 한번 운명적인 강요에 맞설 것이다.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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