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딸에게 깊은 부성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연은 시체를 싣고 달리는 트럭의 운전수란 설정의 좋은 전제가 된다. 인간의 양심을 통제하는 것이 자본에 대한 욕망 이전에 아버지의 부성이란 점은 <트럭>이 괜찮은 드라마의 자질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불청객이 그 트럭에 합승하기까지, 그리고 그 트럭에 합승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련의 긴장감은 스릴러란 장르적 욕망을 지닌 <트럭>의 좋은 연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에게 닥친 시련이 눈덩이처럼 덕지덕지 달라붙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양심조차도 외면한 채, 유기해야 할 시체를 가득 채운 트럭에서, 살인마와 동승한, 철민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럭>은 이 물음에 답변하는 첫 번째 난관에서 뺑소니 치듯 달아난다. 냉철한 논리적 개연성이 절실해지는 순간, 우연을 동원해 달아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당한 편이다. 유해진은 부성애가 깊은 아버지의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다소 평면적이긴 하지만 진구는 극 속에서 요구하는 캐릭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추격자>의 지영민과 <트럭>의 김영호를 비교하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두 살인마는 역할 비중이 전적으로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김영호는 지영민만큼이나 캐릭터적으로 가공될만한 여지를 마련 받지 못한 캐릭터다. 그저 배치된 형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김영호는 정철민의 고난 수위를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물론 살인마의 풍모는 필요하다. 그 평면적인 수위가 그것이다. 문제는 캐릭터가 아니라 상황에 있다. 장철민의 고난을 늘어놓는 것까진 좋지만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안이하다. 게다가 후반부엔 불필요하게 캐릭터의 비중이 흔들린다. 나름대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봉합하고자 마련한 또 하나의 맥락이겠지만 역시나 효과적이지 않다.
자본의 횡포가 선량한 인간을 조롱하고 죄악의 공범으로 몰락시키는 윤리적 태도가 장르적 계기로 나아가는 과정은 <트럭>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이다. 하지만 <트럭>은 그것이 본래 의도된 길목에 들어서서 되려 무기력해진다. 차라리 애초에 선량한 서민이 자본에 놀아나는 과정이 살인마와 얽히는 후반부보다도 더욱 공포스럽다. 구구절절 늘어놓은 사연은 절실한데 그것의 본래 목적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스릴러에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더욱 촘촘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만한 논리적 개연성이 심각할 정도로 안이하게 우연에 몸을 기댄다. 살인마를 태운 트럭이 검문소를 돌파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난데없이 등장한 트럭의 횡포에 줄행랑치고, 살인마와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기로를 오가던 주인공이 제3자의 개입으로 구원 당한다. 그 와중에 엔딩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상황을 개입시키며 무모하게 상황을 종료시킨다. 어쩌면 그것이 실현된 미래가 아니라 정철민이 바라는 일종의 꿈이라 우긴다면 수긍할만한 여지도 있다. 허나 그 이전에 이미 담보 잡힌 문제들이 산더미다. 빚은 한없이 늘어가는데 갚아나갈 능력이 가물가물하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싶은 상황 앞에서 결말은 백치미스럽게 해피엔딩이다. 진정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벌어진 모양이다. 문제는 그것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다. 첩첩산중이다.
2008년 9월 11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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