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듯 흩어지는 찰나의 흐름 속으로 미세하게 스며드는 감정의 출렁임, 그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동시에 순간을 영원처럼 늘어뜨리는 카메라의 섬세한 손길, 그 너머에서 서로 들어맞는 조각처럼 맞춰지지만 파편화되어 떨어져나갈 수 밖에 없는 인연의 간절한 그리움. 로맨티스트의 시계를 가진 왕가위의 시간 속에서 인연이란 그리움과 간절함을 타고난 운명 같은 관계를 의미한다. ‘열쇠를 지니고 있다면 문은 닫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이하, <블루베리>) 역시 운명적 그리움을 수집하는 이들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홍콩이 아닌 뉴욕에 카메라를 고정한 <블루베리>는 왕가위 감독의 영어권 프로젝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드 로를 비롯해 나탈리 포트만과 레이첼 와이즈, 그리고 노라 존스까지 끌어들인 캐스팅도 이색적이며 동시에 매력적이다.-노라 존스는 <블루베리>에 달콤한 음색을 가미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로 인해 성조의 높낮이를 분주하게 오르내리던 중국어 대사들은 간결한 악센트로 빠르게 흘려보내지는 영어로 직진한다. 감성을 담아내는 그릇의 문양은 그렇게 변했다. 그러나 <블루베리>가 비추는 뉴욕의 밤은 종종 홍콩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애초에 왕가위의 카메라에 담겨진 감수성이 어떤 지정학적 영역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닌 덕분이기도 하다. –<블루베리>의 시선을 조율한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쥐와의 첫 번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도 그렇게 보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물론 여전히 찰나를 늘어뜨리는 슬로모션과 무언가를 걸쳐서 인물을 훔쳐보는 시선의 거리감은 여전하다.
애인으로부터 실연당한 엘리자베스(노라 존스)가 애인의 열쇠를 맡기기 위해 카페의 주인인 제레미(주드 로)와 눈을 마주친 순간, 왕가위의 시계는 <블루베리>에서도 작동하기 시작한다. 실연의 상처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한 엘리자베스의 300일간의 여정은 새로운 시간의 굴레로 들어서기 위한 그녀의 심호흡이자 감정의 빈자리를 넓히기 위한 위안의 서사다. 그 안에서 그녀는 수린(레이첼 와이즈)과 레슬리(나탈리 포트만)을 만나 그들이 상실의 상흔을 극복하는 과정을 마주한다. 그와 함께 자신의 그리움으로 달아나듯 뉴욕에서 멀어져만 가던 엘리자베스의 여정은 300일만에 다시 원점을 향한다. 순간의 단위로 수집된 기억을 이어나가듯 세밀한 간격의 끊김을 반복하는 영상, 어느 찰나에 다가온 감정의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여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가길 저항하듯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섬세한 감정의 입자들이 떠다니던 공간에 자리하고 있던 사소한 기억들. 엘리자베스의 여정을 담은 <블루베리>는 분명 왕가위가 사랑하는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블루베리>는 왕가위가 사랑하는 시공간의 구조를 제시할 뿐, 그 공간에 애정을 채워넣을 수 없게 만든다. <블루베리>의 시선은 화면을 채우는 기교로서 활용될 뿐, 그 순간을 이루는 화법으로 통용되지 못한다. 왕가위의 영상은 감정이 출렁이는 공간의 기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수집하는 감수성의 언어가 될 때 사랑스럽다. 하지만 <블루베리>의 영상은 미학으로서의 기능성을 대변할 뿐, 그 공간에 담긴 감정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크린을 부유한다. 감정이 흐르던 공간의 표정까지 어루만지던 그의 손놀림은 <블루베리>에서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블루베리>는 영상이란 수식어와 함께 소통되지 못하는 왕가위의 문체, 즉 이야기가 홀로 떠돌 때 그의 영화가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가를 대변하기도 한다. 겉도는 영상을 등지고 홀로 선 이야기는 정서적 착지에 실패한 채 부유하는 영상의 마중을 받지 못해 정착하지 못하고 맴돈다. 결국 <블루베리>에 채워진 왕가위의 영상은 감정으로 소통될 수 없는 형식이 과잉에 불과함을 증명한다.
왕가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채우는 순간들이 현란한 테크닉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때론 과잉처럼 여겨질 그 기교들이 소박하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소소한 감정을 시공간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섬세한 감수성의 마법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블루베리>의 화면을 채우는 기교들은 미적 강박에 사로잡힌 짙은 화장처럼 느껴져 되려 불편하며 심지어 때론 왕가위를 흉내 낸 습작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차라리 <블루베리>가 왕가위의 것임을 잊은 뒤, 주드 로와 나탈리 포트만, 레이첼 와이즈, 노라 존스가 출연하는 로맨스로 인식한다면 오히려 좋을 것이다. 물론 왕가위를 잊게 만드는 왕가위의 영화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차마 답할 자신은 없다.
2008년 2월 27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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