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윌슨은 냉전이 세계를 이분법으로 가르던 1979년, 라스베가스 호텔의 월풀욕조에 몸을 담그며 플레이보이 모델과 실없는 대화를 나누던 찰나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관한 TV뉴스를 보게 된다. 뉴스에 대한 내용인즉슨, 2차 세계대전 수준의 아프가니스탄 화력은 방탄이 뛰어난 소련의 하인드 헬기를 막기엔 역부족이라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피해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것. 당시 공산진영의 중심인 소련에 맞서 자유진영을 이끌던 미국은 냉전을 진짜 전쟁으로 만들 수 없다는 논리로 이에 전면적인 개입을 망설이던 상황이었다. 그 뉴스를 유심히 지켜보던 찰리 윌슨은 내연의 관계인 조앤 헤링(줄리아 로버츠)의 주선으로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있는 난민촌의 실상을 눈으로 보며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정치적 생리 속에서 적당히 발을 걸치고 있던 찰리 윌슨은 그곳에서 정치적 자아의 눈을 뜨게 된다.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찰리 윌슨의 개입으로 반전을 이룬다. 조앤 헤링의 로비와 CIA요원인 거스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조력을 얻은 찰리 윌슨은 전쟁의 종식을 위해 미국의 참여를 주장하고 동시에 전장의 변화를 도모한다. 소련의 하인드 헬기를 격추시키기 위해선 아프가니스탄의 화력을 보강해야 하지만 그것이 USA상표를 달고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소련의 수출 무기를 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반입시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찰리 윌슨은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각국을 돌며 정치적 로비를 꾀한다. <찰리 윌슨의 전쟁>은 단순히 이야기의 얼개로 보자면 종전을 위한 찰리 윌슨의 활약담이다. 하지만 이것이 ‘찰리 윌슨의 전쟁’이란 타이틀을 지닐 수 있는 건 그가 그 전쟁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라기 보단 역으로 전쟁이 찰리 윌슨이란 인물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당히 정치세계에 몸을 담근 채, 사적인 삶을 즐기던 하원의원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해 종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하는 영화는 결국 작은 돌멩이가 던진 파문의 궁극적 너비를 증명하고자 함이다. 어느 한 개인의 변화를 주목하는 영화의 시선은 세계적 질서를 바라보는 개인의 무관심이 만연하고 있음을 각성하길 촉구하는 미세한 바람일수도 있고, 영화가 제작된 출신 국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이전에 영화가 준비하는 건 위트를 유지하는 남자의 정치적 성숙이다. 정치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함수를 전선에 배치한 이 작품이 지향하는 건 휴머니즘의 진심이지만 그것을 힘주어 외치기 전에 어느 한 인간의 변화를 진득하게 바라보게 함으로서 관객을 설득시킨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개입되는 찰리 윌슨의 정치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개입되는 군소적인 스캔들은 그의 숨통을 옥죄진 않지만 그가 밟고 지나가야 할 걸림돌이 된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는 장면만큼 스캔들의 무혐의를 입증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건 그것이 정치의 생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그의 제자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담고 의무를 행하는 곳은 정치이지만 그가 시야를 두고 있는 곳은 인간의 권리라는 것.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함으로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대외적 사업이라는 것. 그 지점에서 공과 사를 구별하면서도 자신의 지향점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영화의 영민함이 돋보인다.
찰리 윌슨의 명예CIA요원직을 수여하는 단상에서 한차례 과거로 고개를 돌린 이야기는 다시 그 단상으로 고개를 돌려 그에게 명예요원직을 수여한다. 과거의 사연을 접하기 전과 후, 찰리 윌슨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이 호기심에서 숙연함으로 달라졌음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변화가 만들어낸 작은 출렁임은 거대한 세계에 파문을 전달했다. 그리고 <찰리 윌슨의 전쟁>은 이 영화 같은 현실담을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물론 찰리 윌슨의 업적은 오늘날 ‘알 카에다’같은 중동의 무장세력이 기반을 조성하는데 일조했다는 비난도 함께 받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서 그의 변화는 인간이 갖춰야 할 미덕이었을 것이다. 장난감인 줄 알고 집어 든 물건이 폭탄이라 두 팔을 잃게 된 아이를 바라보는 찰리 윌슨의 심정이 먼 미래의 부작용을 위해 현실을 외면했다면 그 현실로부터 이어진 오늘은 더욱 참혹하고 끔찍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 일어난 사건은 오늘 봐야지. 그게 내 경쟁력이야’라고 말하는 찰리 윌슨에게 시급했던 건 내일보다 오늘이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적어도 작은 관심을 간과하지 말 것. 우리가 로비를 통해 전쟁을 막을 순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런 자격이 되는 인물을 알아보고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하긴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경제만 살리면 되지, 라고 말하는 그대라면. 물론 모든 건 '두고 봐야지(more thing)'.
2008년 1월 31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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