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파이프 오르간 음으로 시작을 알리는 <스위니 토드>는 원작의 잔혹한 기운을 잿빛으로 톤다운된 영상의 음울함으로 대변한다. 마치 과거 흑백영화의 무채색 질감에 근접할 정도로 채도를 낮춘 영상의 질감은 인간의 낯빛에 가미된 혈색마저 차단하듯 차갑게 느껴진다. 이는 동시에 스위니 토드가 되어 런던으로 돌아오는 벤자민 바커(조니 뎁)의 증오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 음산한 기색의 영향권을 공간적 정서로 활용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스위니 토드>는 그렇게 원작 뮤지컬이 짊어져야 했던 무대라는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기술적 효과를 통한 영화적 기교를 통해 정서적 중압감을 제공한다.
사실 <스위니 토드>는 원작 뮤지컬의 영화화란 점만으로도 기대감을 성립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나 <스위니 토드>는 그 본질과 무관하게 팀 버튼 감독이란 전제가 어째서 기대할만한 이유인가를 입증하고 있다. 살의로 가득 찬 스위니 토드(조니 뎁)의 잔혹한 심기를 공간의 정서로 확장하는 그의 능력은 타인의 장기를 마치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듯 능수능란해 보인다. ‘아랫 놈이 윗놈을 잡아먹는 세상’을 열창하는 <스위니 토드>의 반사회적 세계관은 팀 버튼의 세계관을 거치며 장난끼 넘치는 극악함으로 걸러진다. 음흉한 기운이 농밀한 잔혹 뮤지컬의 생기를 고스란히 체득한 <스위니 토드>는 영화적인 색상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양자의 에너지로 팽창된다. 또한 리드미컬하게 변주되는 와중에 종종 절묘한 화음을 형성하는 뮤지컬 방식의 대화는 <스위니 토드>의 장르적 보편성에 특별한 음색을 가미하며 개별적인 악보로 완성된다.
물론 그것이 조니 뎁을 비롯한 배우들의 역량에서 기인하는 바라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팀 버튼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시대적 배경을 두른 뮤지컬 원작의 외양적 묘사 안에서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붉은 피를 철철 넘쳐 흐르는 잔혹한 살인을 되려 유쾌한 뮤지컬의 리듬으로 구현해낸 역설의 재치는 발휘되지만 그건 극단적 방식에 불과할 뿐 특성화된 팀 버튼의 세계관이 투영된 바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스위니 토드>의 그로테스크는 시각적인 면보다도 인간의 심리적 횡포가 발생시키는 결과적 관계의 아이러니, 즉 의도와 결과가 뒤틀려버린 그로테스크한 관계적 형상에 방점을 찍는다. 복수심에 눈이 먼 인간의 잔혹한 행위가 결국 자신의 의도를 성취해냈음을 만끽하려던 찰나에 받아들여야 하는 절망감. 지독한 분노로 자신을 제어하던 인물의 성취적 환희가 파멸의 종주곡으로 몰락하는 순간, <스위니 토드>의 심리적 그로테스크는 레퀴엠으로 울려 퍼지며 지독한 핏빛 여운을 새긴다.
손드하임의 원작 뮤지컬이 지닌 명성에 기대지 않아도 팀 버튼의 <스위니 토드>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사람의 목을 긋는 이발사와 인육 파이를 만드는 여인, 그들이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음색. 플롯의 잔혹한 본능이 경쾌한 멜로디와 어우러지는 역설의 기괴함은 스크린의 틀 안에서 절묘한 힘을 발휘한다. 또한 복수와 좌절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결말은 통쾌함과 비통함이 또아리를 트는 역설의 여운을 부여한다. 결국 <스위니 토드>는 원작의 세계관을 작가적 역량에 담아 개별적인 작가적 세계관으로 완성하고 구현했다는 것에 깊은 호감을 부여하게 한다. 심리적 강박에 의해 뒤틀린 인간의 형상, 지독하게 일그러진 인간의 감성이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기괴한 국면 앞에서 참혹한 여운이 발생한다. 이는 동시에 유아적 상상력을 발산하던 팀 버튼 감독 특유의 장기가 중후한 깊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원작의 중후한 매력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의 색상을 입혀 넣는 재능은 분명 심상찮은 사람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게다가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관객을 유혹하는 조니 뎁과 함께 한 <스위니 토드>라니, 어떤 염치를 불문하고 당신에게 <스위니 토드>를 권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1월 5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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