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사는 대학생 김혜정씨(22세)는 소위 드라마 폐인이다. 지난 8월 종영한 KBS 2TV <경성 스캔들>의 매력덩어리 ‘선우완’에 푹 빠졌고, 이를 연기한 강지환이란 배우까지 사모하게 됐다. 그 이후 그의 출세작 <굳세어라 금순이>를 시작으로 그의 출연작을 하나 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이 생겼다. 포털이 알려준 그의 영화 데뷔작 <방문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온갖 고전들이 컬렉션 되어 있다는 IT 강국 대한민국의 ‘어둠의 경로’에도 지환 오빠의 <방문자>는 알현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아니 2006년 가을에 버젓이 극장 개봉도 했고, 인터뷰 기사도 한 두 개가 아니고, 무슨무슨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라는데. 도대체 왜, 왜, 왜 볼 수가 없는 거야!
지환 오빠의 데뷔작을 보여 달라!
서울에 사는 주부 ‘thebest’님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에 열광하는 10대들에 비하면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늦게 시작한 ‘팬질’이 무서운 법. 혜정씨의 경로와 비슷하게 공식 팬클럽도 가입하고, 드라마 페인들이 모인다는 DC 인사이드 강지환 갤러리 ‘키쑤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한 가지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어엿하게 주연으로 성장한 강지환의 데뷔작이 DVD로 출시되지 않았다는 미스터리 말이다. 순수하게 영화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은 의문으로 발전했고, 순수한 욕구가 결국 실천을 불러왔다. 지금껏 볼 수 없었다면 우리가 직접 행동에 나서면 되지 않는가.
9월 말, ‘thebest’님은 갤러리에 <방문자>를 보고 싶다는 게시 글을 올렸다. 반응은 나름 폭발적이었다.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여럿 달렸고, 함께 해보자는 응원군도 생겼다. 그래서 모인 것이 혜정씨와 닉네임 ‘thebest’와 ‘모던땐수’ 3인방.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에 그쳤었는데 이러다가 평생 못 볼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고 학생의 본분(?)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시간을 활용했죠.”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이던 막내 혜정씨가 이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다.
세 사람은 강지환의 소속사에 전화도 걸어보고, 영화진흥위원회 DVD 제작지원프로그램도 알아보고, DVD 판권을 가지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에도 문의를 했다. 오로지 오빠의 데뷔작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단, 지환 오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다. 일이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선물’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처음엔 희망도 안 보이고 막막했어요. 고민 끝에 CJ 측에 이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했는데 ‘준비 중이다. 하지만 아직은 출시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오더라고요.” 혜정씨를 비롯한 3인방은 좌절하지 않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라 공식팬클럽의 힘을 빌리기도 쉽지 않았다. 제작진에게 수소문도 해 보고 계속해서 CJ 구매판권 담당자를 귀찮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생각 없다’던 CJ측이 ‘팬들을 위해 500매 정도는 선구매를 단서로 제작할 용의가 있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마니아 드라마였던 <경성스캔들>도 팬들의 성화에 KBS측이 1,000장 DVD를 발매한 전력도 있었다. 희망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방문자DVD 카페(http://cafe.daum.net/hostnguest)’도 새로 열었다. 고맙게도 강지환의 일본, 중국 팬들도 문의를 해오기 시작했다. ‘서플먼트에 지환 오빠 코멘터리는 꼭 들어가야 되는데’ 하는 욕심 아닌 욕심도 생겼다. 근데 다른 독립 영화 DVD도 이렇게 어렵게 출시되는 거야?
왜 <방문자>는 ‘방문자’ 취급도 못 받았나
2006년 11월 15일 개봉한 <방문자>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5주간 상영, 단관 개봉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관객 점유율과 입소문을 타고 2번에 걸쳐 연장 상영되는 기염을 토했던 작품.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미 호평을 받은 뒤,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필두로 시드니, 홍콩 등 20개 가까운 국, 내외 영화제에서 소개됐고 특히 시애틀영화제에서는 뉴디렉터스 경쟁 부문 최고 신인감독-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방문자>는 시니컬한 ‘386’ 영화과 시간강사 호준(김재록)이 반듯한 외모에 모범생인 열혈 ‘신앙 청년’ 계상(강지환)을 만나 변모해 가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 베를린에서 신동일 감독을 일컬어 ‘한국의 우디 알렌’이라 칭할 정도로 독창적인 유머감각을 인정받으며 해외영화제의 잇따른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정치적인 감각과 깊이 있는 캐릭터탐구, 상업영화를 뛰어넘는 전개방식으로 언론의 조명과 함께 독립 영화의 수작이란 평가를 이끌어냈다.
아프리카를 제외한 전세계 모든 대륙에서 소개된 작품을 우리는 왜 지금 볼 수 없을까. 호준을 연기한 김재록 씨가 “사실 촬영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이 극장에 개봉할 줄은 몰랐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방문자>는 독립영화 방식으로 촬영됐다.
|
이후 뒤늦게 작품의 가치를 인정한 당시 LJ필름은 후반 작업 중 제작사로, 그 이후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 배급사로 합류하게 됐다. 그러나 CJ와의 제휴관계가 끝난 LJ필름은 프라임엔터테인먼트로 합병됐고, 그 사이 <방문자>는 CJ엔터테인먼트의 관심밖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친부모를 떠난 아이가 여러 부모에게 입양되면서 서자취급을 받게 된 셈이다.
그 사이 2006년 이미 완성된 신동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자 프라임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또한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되어 허문영 프로그래머로부터 ‘드물게 포스트 80년대를 사유하는 감독의 놀라운 영화이자 <방문자>를 뛰어넘는 성취’라는 취지의 평가를 얻어냈다.
아직 미개봉 상태인 이 작품은 2007년 한 해 홍콩, 시애틀, 멜버른, 카를로비 바리, 시카고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 소개되었다. 해외 관객들은 볼 수 있지만 정작 국내 관객들은 볼 수 없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방문자>는 프랑스 주트로페필름(Zootropefilm)에 수출되어 올 12월에 프랑스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극장에서 놓친 작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
그렇다면 강지환의 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도 <방문자>의 DVD를 볼 수 있는 걸까. 실무를 맡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 측 한 관계자는 “꾸준히 준비를 해오고 있었으나 출시 여건이 안 되서 늦어진 것뿐이다. 검토를 해오던 차에 팬들이 먼저 요청을 해 왔고 원하는 분들이 많다고 해 출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12월 초가 되면 (출시 여부가) 확정될 것 같다”라는 입장을 조심스레 밝혔다.
하지만 팬들의 말은 조금 다르다. “수소문 끝에 먼저 담당 이사님하고 통화를 했어요. 출시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며 확답을 해줬지만 출장 중이던 실무자가 돌아오니 차일피일 미루고 또 달라지더군요.” 그래서 혜정씨 3인방이 제안한 것이 바로 영화 DVD로는 이례가 없던 ‘500장 선구매’ 출시다.
뒤늦게 카페 개설과 DVD 출시 관련 소식을 접하게 된 신동일 감독은 “강지환 씨의 팬들이 이렇게 나서 준 것이 대해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방문자>가 외국에서 상영 될 때마다 관객들로부터 DVD로도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을 많이 들었다. 다양성 영화들이 더 넓게 관객과 소통할 수 없는, 얼핏 화려한 규모지만 실상은 척박한 국내 영화 시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며 말을 아꼈다.
가뜩이나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2차 부가판권 시장. 그 첫 번째 희생양도 물론 독립 영화, 작은 영화들이다. 단관 혹은 조촐한 규모로 짧게 극장 상영을 마쳤더라도 DVD 출시가 쉽지 않은 상태라 뒤늦게 개별 작품을 발견한 관객들이라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요원해 지고 있다.
<괜찮아, 울지마>의 민병훈 감독이 지난 8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양성이 인정되는 좋은 영화는 DVD 2만장 정도를 보급하고, 구민회관이나 공공·학교도서관 등이 무료로 틀 수 있게끔 하라"는 대안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DVD 숍은커녕 케이블 채널에서도 볼 수 없는 허망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다. 그는 "10명의 관객이라도 작품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며 거대 배급사에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영화인들을 꼬집었다.
곧 개봉을 앞둔 독립 장편 <은하해방전선>의 윤성호 감독이 “극장 개봉도 중요하지만 1만 명 정도 동원을 해서 케이블이든 DVD든 인터넷이든 많이들 볼 수 있는 통로가 열렸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표현한 것도 작금과 같은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에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가 국가인권위와 함께 마련한 ‘영화로 인권 보기, 인권으로 영화보기’ 강좌가 열렸다. 수소문 끝에 <방문자>의 일부 장면을 확보, 수강생들과 함께 본 경북대 법학과 김두식 교수는 강의 중 “다양한 종교들 속에서 어떻게 상호 존중하며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방문자>만큼 적합한 영화가 없었다. 국제 영화제 수상작을 이런 식으로 구해 봐야 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천만 관객 시대, ‘빈익빈 부익부’로 치달아가는 영화판이지만 작은 영화, 다양한 영화에 대한 수요는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결국 ‘영화는 산업’이라는 미명하에 흥행성을 최우선 척도로 내세우며 점점 할리우드를 닮아가려고 하는 영화계 내부에 있다. 지환 오빠의 데뷔작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이유로 시작한 ‘혜정씨 3인방’의 노력이 의미 있고 특별한 이유도 작금의 영화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계를 자극할 수 있는 하는 가장 큰 동인은 바로 작고 다양한 영화를 성원해주는 관객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26일 월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