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트 러쉬>는 그 평범한 세상에 가득 채워진 음표를 만나는 작업이다. 세상은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대사는 영화 밖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아는 진실이지만 그것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거스트 러쉬>가 묘사하는 천재성은 그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이성적 인지를 넘어서 가슴으로 느끼고 감성으로 체득하는 천재적 감수성. 범인(凡人)의 청력에 소음으로 통용되는 일상의 소리는 소년에게 리듬으로 체화(體化)되고 멜로디로 공명한다. 세상에 널린 무질서한 소리의 체계가 소년에게 음악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의 감동은 <어거스트 러쉬>의 이야기적 여백이 지닌 순수한 감동으로 전이된다.
에반(프레디 하이모어)의 천재성은 혈통적인 기반과 소년의 신념을 통해 설명된다. 락 밴드 출신의 아버지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전도유망한 첼리스트 라일라 노바첵(케리 러셀)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는 결국 에반의 태생적 원인이 된다. 두 남녀의 만남은 결국 서로 다른 장르에 기반한 두 음악이 크로스오버적 선율로 빚어지는 것처럼 천재를 잉태한다. 동시에 ‘사람들이 동화를 믿듯 난 음악을 믿는다’는 소년의 신념은 재능을 담아내기 위해 준비된 그릇처럼 보인다.
소년의 음악적 통찰은 교양의 습득을 통한 빠른 성장이라기 보단 체내에 잠재된 재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장의 서사를 결핍시키는 방식이기에 설득력을 반감시키는 감상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는 이성적인 사고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평범한 서사의 구조를 중시하는 범인의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적 특수성인 까닭이다. 소리를 음계로 승화시키는 소년의 천재성은 단순히 절대음감의 본능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리듬과 멜로디의 본능을 인정한다 해도 음계를 파악하는 객관적 숙련을 일시에 뛰어넘는 과정은 논리적 맥락을 요구하는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성적인 구조에 따른 해석이냐, 감성적인 흐름에 따른 감상이냐에 따라 <어거스트 러쉬>의 악보는 상반되게 읽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음악 영화로서 <어거스트 러쉬>는 일정한 포만감을 부여할만하다. 세상에 산재한 소리를 악보로 정렬하는 소년의 선천적 재능은 일상적 사운드를 캐치하는 카메라의 동선을 통해 시각적 리듬을 구현하기도 한다. 이는 음악적 청취감을 시각적으로 상승시키는 묘미를 얹혀준다. 또한 음악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 해도 감상의 묘미를 살릴 수 있다. 특히나 조나단 라스 메이어스의 수준급 락보컬이 인상적이며,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스트리트 뮤직의 낭만도 경쾌하다. 또한 관현악단의 섬세한 연주를 살린 클래식 연주의 감미로운 엔딩은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어거스트 러쉬>은 음악적 인생을 신뢰하는 인물들이며 그들의 여정 또한 음악을 기반으로 할 때 빛난다. 그들에게 음악이 결핍될 때 인생의 상실감 또한 커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적 향유를 삶의 기반으로 삼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투영하며 그런 개인의 예술적 열정이 형성하는 세계적 감동의 완성을 그려내고자 하는 여정의 필연이다. 개인의 천재적 재능이 사회를 감동시키는 과정은 아름답다. 그건 천재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천재성을 발휘하도록 용인하는 사회적 포용력 덕분이기도 하다. 그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How do this music come to you?)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소년의 신념, 즉 그 순수한 예술적 믿음이 다수의 마음을 흔드는 순간으로 대답되는 것이다. 다소 작위적인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엔딩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는 건 그 순수한 감동의 전이야말로 <어거스트 러쉬>의 순진한 표정일 것이라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덕분이다.
2007년 11월 17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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