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적은 내부의 결속을 강화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의 적이 식별이 가능한 온전한 형체를 지녔을 때의 이야기다. <인베이젼>은 하나의 세포 상태로 진화된 바이러스 형태의 외계 생물체에 의해 내부의 결속이 강화되기도 전에 감지할 수 없는 적에 둘러싸인 인간의 불안감을 먼저 체감해야 한다. 게다가 외계에서 날아온 고등 바이러스는 인간의 육체를 단지 생명을 위한 숙주의 기반으로 삼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성을 마비시킨 채 이성을 장악하며 완전한 종적 지배를 꾀하려 한다.
<인베이젼>의 궁극적인 공포는 그 곳에서 발생한다.-혹은 되어야 한다.- 육체성의 상실이 아닌 인간성의 말살, 그 지점에서 원초적인 종적 보존의 위기감이 잉태된다. 배다른 형제 같은 전작들과의 차이점 역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인베이젼>은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의 적을 고발하던 전작들의 내수적 영향력을 전세계적으로 확장된다. 자국적인 사안들, 정치 성향이나 문화적 세태를 풍자하던 내부 정화의 기능은 조금 더 범위를 확장해서 전세계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의 국가적 영향력을 비판하며 동시에 인간본성에 대한 고찰을 동시에 아우른다.
물론 일차적으로 주입되는 건 스릴러적 긴장감이다. 가까운 이웃 혹은 가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으로 돌변하는 상황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과 고립의 공포감을 활성화시킨다. 감염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감정이 결여된 인간에 대한 이질적인 공포를 형성하며 그들을 옆에 두고 경직된 시내의 풍광을 바라보는 캐롤(니콜 키드만)의 위장된 무표정과 내면의 긴장감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또한 감염자들이 비감염자를 포획하기 위해 추격하는 씬에선 마치 <28일후>같은 좀비영화와 동일한 긴장감이 포착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과 후반의 긴장감은 각각 밀도차를 지난다. 전반부의 긴장감이 속을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적 긴장감이지만 후반부의 긴장감은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물리적 타격성을 전제로 한다. 이는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을 양분시키며 그 흐름에 따라 단계적인 성장률을 보여야 할 쾌감의 속성에서 배반적이다. 이는 밀도의 문제가 아니라 소재로부터 형성되는 속성의 차이가 일관적으로 작용되야 할 장르적 쾌감의 지속적 상승을 방해하는 탓이다.
<인베이젼>은 구체적인 세태에 대한 은유와 동시에 인간성이란 표본에 대한 사유를 꾀한다. 하지만 장르적 쾌감의 연출과 궁극적인 메시지의 전달, 그 어느 사이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전인류의 멸망 전에 전쟁 같은 범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본성적 비판을 꾀하면서도 ‘인류는 진화하고 의식은 변모한다’는 인물의 태도를 통해 희석시킨다. 결국 <인베이젼>은 원초적인 재미와 철학적인 메시지 사이에서 그 어느 것도 확실히 다지지 못한 채, 어정쩡한 형태로 남겨진다. 그 말미에서 드는 막연한 생각은 단순하게 장르적인 재미에 주력했다면, 혹은 좀 더 국지적인 형태의 사유를 던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아닐까.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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