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서 선잠을 자던 교수(정진영)는 문득 눈을 뜨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한다. 기사엔 터널에 매몰된 대학생들의 기사가 나온다. 그러던 중, 홀연히 눈 앞에 나타난 나비 두 마리의 팔랑거리는 날갯짓을 쫓던 교수는 강의실에 당도한다. 나비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선 그는 강의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과 마주한다. 그리곤 그는 강의실 밖을 맴돌던 나비를 바라보다 강의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은 무언가에 홀리듯 시작되는 거야. 운명처럼 다가오는 거지.’ <별빛속으로>는 교수의 말처럼 신비로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한여름 밤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헤매는 꿈이거나 한낮 선잠 속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백일몽처럼. 하지만 이 신비로운 사랑이야기는 기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 이야기가 (종래에 가야 이름을 알 수 있는) 교수의 체험담인지, 혹은 그가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목적을 위해) 은연중에 지어낸 허구인지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대상들은 (알고 보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다. 결국 이야기의 소재도 불분명한 허상이며, 이야기를 듣는 객자도 불분명한 허상이다. 결국 <별빛속으로>의 이야기는 독백처럼 들리기도 하고,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궁극적으로 <별빛속으로>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당사자에겐) 거짓말처럼 다가온, 혹은 (청자에겐) 거짓말처럼 들리는 꿈 같은 이야기인 덕분이다.
사실 <별빛속으로>의 이야기가 거짓처럼 들리는 건 이야기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박정희의 얼굴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놓던 그 시절의 풍경들. 대학가는 투쟁을 외치고, 얼룩 반점이 가득한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이 즐비하던 시절. 진짜는 거짓말 같고, 가짜는 진실 같던 시절이 배치된 풍경엔 시대에 얽힌 주관이 개입한다. 죽은 자와 산 자들은 한 공간에 존재하지만 오로지 죽은 자들만이 시대로부터 자유롭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요 받지 않는 자도 죽은 자이며,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하는 자도 죽은 자다. 시대적 이념이 절실하여 낭만조차 수상하던 시절의 서글픔이 산산이 흩어지는 꽃잎처럼 아련하게 흩날린다. 그래서 <별빛속으로>는 망자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감상을 섞여야 하고, 때론 죽음의 경계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갈구하는 절절함으로 치닫기도 한다.
<별빛속으로>의 별빛은 거짓 같은 불꽃놀이 –그것도 대공포 사격에 의한-가 존재하는 시대 속에서 운명처럼 반짝이는 사랑일 것이다. 낭만조차 수상했고, 행복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서 삐삐소녀(김민선)는 이념을 위해 생을 포기하지만 그 시대 저편으로 밀려나는 수현(정경호)에겐 ‘늦기 전에 일어나라고’ 당부한다. <별빛속으로>는 그렇게 시절의 아픔을 운명적 애절함으로 치환하며, 세대의 전환을 통해 시대를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당부한다. 시대에 희생당한 넋은 비록 백일몽처럼 아련한 꿈결 속 비극일 뿐이지만 그것이 비단 꿈처럼 아련하지 않은 건 그 시절이 그만큼 절실했음 때문이다. 그 안에 황규덕 감독의 비장한 사심이 섞인 환상적인 사랑이야기가 녹아 들었다.-사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리라.- 물론 마지막까지 그 사심 섞인 이야기가 사실인가, 거짓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에 홀린 학생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관객 또한 느낄 것이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에 스스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노라고.
2007년 7월 31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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