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므이>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인물 간의 갈등구조는 참신하다. 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불현듯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함은 단지 시각적 효과의 승산만은 아니다. 인물 사이에 놓인 알 수 없는 과거지사가 관객에게 거리감을 조성하며 정체가 불분명한 심리적 긴장감의 징후를 형성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이는 시야적으로 확보되지 못한 관객의 맹점을 활용한 효과와 맞물리며 전반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저주가 서린 초상화의 원혼이 여성의 복수심을 모태로 한 원한에 빙의된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다. 유치할 수도 있는 구시대적 소재를 현실적인 갈등과 엮으며 적당한 설득력을 낳는다. 특히나 두 여자 사이에 위치한 질투와 배신은 심리적 날을 세우며 공포의 거리감을 면전으로 끌어당긴다.
언제부턴가 공포영화들은 사운드로 관객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므이>도 마찬가지다. 시작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결말 어느 부위쯤을 듬성 잘라 관객에게 내 던지며 과장된 사운드와 어두운 조명 빛으로 긴장감을 강요한다. <므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보던 공포 영화의 효과들과 다를 바가 없다. 허나 새로울 것 없는 효과들이 중후반부까지 일정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는 건 내러티브에 대한 신뢰감이 작동하는 덕분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적당한 효과를 발휘하는 건 오히려 탄탄한 장르의 답습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서사를 따라가며 적당한 수위를 유지하던 효과가 막판에 이르러 널뛰기를 시작한다. 특히 후반부 구체 관절 인형처럼 등장한 원혼의 모습은 사다코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것이 닮았다고 해서 죄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뿜어내는 기운 자체가 떼어낼 수 없는 판본 같은 캐릭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면 그건 분명 외면하기 힘든 문제다.
사실 가장 큰 의아함은 <므이>가 지닐법한 지정학적 특수성, 베트남이란 이국에 대한 거리감을 공포로 합류시키지 못했는가란 문제다. <므이>는 이국의 전설과 저주를 스토리에 담아내며 감정의 근본 지점으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론 단순한 소재의 일환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 윤희(조안)가 지니는 경계심을 베트남이란 타지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므이>는 그런 경계심을 자연광이 폐쇄적으로 스며드는 광원의 차단과 음원지를 알 수 없는 사운드의 모호함으로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이 비단 영역적 특별함을 설명하는 수단이라 하기엔 부족하다. 단지 베트남의 초상화가 필요했을 뿐이었는지, 그곳이 한국이 된들 뭐가 달라지는 것인가란 의문을 배제하기 힘들다.
<므이>는 이야기가 다진 반석에 답습의 효과로 기둥을 세우다 결말의 과잉으로 흔들리고 이내 주저앉는다. 호러적 거리감을 유지하던 상황이 막판 잔혹극을 통해 우격다짐으로 돌변하며 유치한 피칠갑 퍼레이드로 내려앉는다. 굳이 폭력적인 과잉으로 이야기를 몰아넣으며 복수극의 상황을 확인해야 했을까? 사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무서운 것임을 <므이>는 잘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 <므이>의 질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건, 악령의 실체가 출몰하는 것보다 여자들의 갈등이 구체화된 지점이었다. 중후반까지 유지하던 효과가 빛을 발한 건 그것이 불길함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학적 폭력으로 드러나는 순간 발견되는 건 스스로 가능성을 부수고 태어난 과잉의 흔적이다. 빛을 발하던 절제와 순발력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2007년 7월 19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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