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오른 <도그빌>을 뒤로 한 그레이스(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만덜레이>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인 노예를 벌하는 농장주(로렌 바콜)를 목격한 그녀는 갱단 두목인 아버지(윌리엄 데포)의 힘을 빌려 노예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노예로써 길들여진 그들이 생활력이 없음을 관찰을 통해 발견한 그녀는 그들에게 생활력을 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만덜레이에 머문다. <도그빌>의 그레이스(니콜 키드만)와 마찬가지로 <만덜레이>의 그레이스 역시 외딴 마을에 머문다. <도그빌>이 우연스러운 계기로부터 이야기의 너비를 확대시킨다면, <만덜레이>는 선택을 거쳐 이야기의 깊이를 파고 든다. 이는 <도그빌>의 그레이스가 발발의 계기가 되는 객체로서 존재함에 비해 <만덜레이>의 그레이스가 확신을 지닌 주체로서 사건을 주도한다는 점에서도 명백한 태도의 차이를 보인다. <도그빌>의 그레이스가 관찰자의 입장이라면, <만덜레이>의 그레이스는 행위자의 입장인 셈이다.
그건 <도그빌>이 자학적 폭로였기 때문이고, <만덜레이>는 고백적 성찰이기 때문이다. <만덜레이>는 노골적인 속죄양을 표출한다. 하지만 그 제스처는 화해에 대한 진심이라기보단 위선을 담은 오만함이란 조롱이다. <만덜레이>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스스로가 밝힌 미국3부작의 의도처럼 미국이란 사회 그 자체를 조롱하기 위한 무대 장치다. <만덜레이>는 브레히트 기법의 거리감을 둔 <도그빌>과 동일하지만 좀 더 직설적인 화두를 건드리며 미국의 폐부를 건드린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를 건드리며 제도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의식의 정체성을 비꼰다.
흑인노예를 해방시키는 그레이스는 양심적인 백인의 상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 흑인노예의 등에 채찍을 가함으로써 위선으로 드러난다. 결국 울타리에서 해방될 권리를 지니지만 울타리의 정신적 속박을 넘지 못하는 흑인노예의 모습을 통해 식민의 역사를 종용한 가해자의 책임을 부각시킨다. 폭력과 강압이란 수단으로 둘러진 울타리는 그 수단이 철폐된 후에도 정신에 깊게 뿌리 박힌 속박의 파편은 경계를 넘어설 수 없게 만든다. 가해자의 폭력은 결과적으로 폭력을 거둬들이는 것으로 역사를 청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은 사라져도 영향력은 지속된다.
연작의 성격상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일지 모르나 <만덜레이>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 가치관의 영향 아래 놓인 오늘날의 세계적 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프리카의 비극과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은 어디서 출발했는가. 과연 흑인은 열등해서 가난한 것일까? 우리와 관계없는 지정학적 역사를 조명하는 <만덜레이>가 우리에게 주목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도 불과 한 세기 전 누군가에게 길들여져야 하는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떠올린다면 <만덜레이>는 이 땅의 역사와 무관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 폭력이 남긴 육체적 상흔은 정신에 흉터를 남긴다. 그건 지금 이 세계의 구도로 증명된다. 그리고 <만덜레이>의 무대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2007년 7월 12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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