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파(킬리언 머피)의 나레이션으로 출항하는 <선샤인>은 ‘이카루스 2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인사말로 관객을 탑승시키고 대니 보일 호 우주 유영을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선이 관객의 눈에 보이는 모양새다. 원형으로 펼쳐진 이카루스 2호의 둥근 태양창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나아갈 때 카메라는 태양의 중심에 이카루스 2호를 얹어놓는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태양 한 가운데 자리한 이카루스 2호는 마치 불타는 눈동자 속 동공처럼 보이고 스크린은 마치 하나의 눈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니 보일 호’라는 것. 사실 시작에서 두드러지는 건 ‘우주 유영’인데 <선샤인>은 결말에 다가갈수록 화자의 개인적 야욕으로 점철된다. 애초에 디스토피아적 예감으로 출발한 반투명의 정서는 태양에 다가갈수록 이글거리는 인간들의 야욕에 의해 스릴러적인 정서로 짙게 변모되어간다. 심리적으로 강박적 충격에 휩싸일 때 나타나는 동공 축소처럼 태양에 근접할수록 태양의 눈동자는 점점 작아지는 이카루스 2호를 감싼다. 그리고 그 사악한 불길에 감싸여가는 이카루스 2호의 내부는 태양이라는 거대 존재에 잠식되어가는 8명의 승무원들이 겪어가는 혼란으로 진행된다. 동시에 스크린은 하나의 눈동자가 되어 관객을 바라본다. 그것은 아마도 대니 보일의 눈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눈은 이카루스 2호 안에 탑승한 인간들의 욕망 그 자체로 변질된다.
인간을 구하기 위한 SF 휴먼 프로젝트쯤으로 예고되는 <선샤인>은 희생이란 단어에 교묘하게 감춰둔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보고서다. 8명의 대원들이 한명한명 순차적으로 희생당하는 것도 반반이다. 반은 대의적 목적에 의해서, 반은 개인적 욕망에 의해서. 전반부의 희생도 사적인 욕심의 실현에 어느 정도 발을 들인다. 특히 카네다(사나다 히로유키)나 셔릴(클리프 커티스)의 희생은 숭고함만으론 정의되기 힘든 맹목적인 광기가 서려있다. 희생과 함께 맞바꿀 수 있는 것. 바로 태양이란 거대 존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카루스적 광기가 발견된다.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며 긴박한 서스펜스의 축을 형성하는 미지의 대상도 그렇다. 광신도적 기운을 뿜어내는 정체불명의 괴인은 우주선을 밀실미로로 만들어 버리며 사이코 스릴러적 긴장감을 강하게 주입하지만 장르적 변형의 의도는 생뚱맞다. 결과적으로 <선샤인>은 장르의 성격을 무시한 대니 보일의 개인적 욕구 해소의 장인 셈이다.
<선샤인>은 장르적인 이해에서 절반의 성공에 가깝다. 스크린에서 살아 숨쉬듯 이글거리는 태양은 미니어처와 CG의 기술력을 통한 스페이스 황홀경이다. 하지만 상상력의 부족인지 지나친 자기도취인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정체성은 장르적 변형을 통해 관객을 교란시키는 의도를 속 시원히 밝혀주지 못한다. 아마도 대니 보일은 마치 신의 거대한 구조물인 태양이란 존재에 사로잡힌 인간의 광기를 통해 먼지 같은 인간의 존재와 거대 자연의 존엄성을 대비시키고자 했던 것만 같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인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태도는 부정확하다. 결국 장르적 변환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없는 관객에게 <선샤인>은 가늠할 수 없는 태양의 정체처럼 모호한 여운을 남길 듯하다. 물론 인간의 손이 빚어낸 스크린 속 우주는 진풍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대니 보일이라는 감독의 마인드에 깊은 애정을 지니지 못한 관객에게 <선샤인>은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일지도 모른다.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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