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의 탄생 비화를 다룬 <굿 셰퍼드>는 본질적으론 미국이란 화자가 던지는 자아 탐구다. 사실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전 세계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태도는 영국 청교도 이주를 밑바닥에 둔 얕은 역사적 정체성을 가리기 위함에 가깝다. 인종의 전시장이라 불리는 미합중국(U.S.A)의 다양성은 역으로 국가적 근원의 얄팍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얄팍함은 그들이 만들어낸 보금자리, 자신들의 본토 수성을 위한 국가력 증강의 자구책으로 발전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은밀한 정보 공작 시스템의 총아인 CIA(미 중앙정보국)는 미국이란 국가가 부풀린 근육질 뒤에 숨겨 놓은 나약한 골격을 지탱하려는 생존방식인 셈이다.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된다’는 그들의 논리는 지극히 미국적인 현실 그 자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민족의 융화라고 내세우는 미국의 용광로 같은 사회가 다민족적 연대의 장이기도 하지만 세부적으론 편협한 결탁의 뉘앙스이며 차별적 공존의 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현실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하나의 지침 같은 강박을 형성한다.
사실 <굿 셰퍼드>는 가족주의적 허상이 모여 만든 미국의 위상을 나직이 고백하는 작업이며 동시에 대의에 짓눌린 작은 존재에 대한 동정이다. CIA라는 정보기관의 번지르르한 정보적 우위는 시대적 요청을 빙자한 국가적 사명감의 양자 같지만 미국이란 하이브리드 사회의 지탱을 위한 발악적 자구책에 가깝다. 이런 현실에서 문장에 대한 통찰력이 낭만적 시구에 소비되는 건 재능의 낭비이기에 에드워드(맷 데이먼)는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는 정보전에 자신의 재능을 소모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지극히 중립적이다. 특히나 결말에 이르러선 자아비판과 자기변호의 사이에 애매하게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어느 노선에 기울이지 않은 중의적 태도는 <굿 셰퍼드>가 폭로전의 쾌감에 방점을 찍는 대신 피로한 개인적 단상을 잡아내는데 치중했음을 드러낸다. 더불어 총자루 한번 쥐지 않는 첩보물이라는 점은 더더욱 그런 사실에 근거가 된다. 박진감 넘치는 활극이나 음모에 대한 폭로적 통쾌함으로 곧잘 둔갑되는 스파이 영화의 허구적 리얼리티는 <굿 셰퍼드>와 무관하다. 무뚝뚝할 정도로 감정이 배제된 타자의 시선으로 거리감으로 냉전 시대 미국을 조명함으로서 대의를 빙자한 위선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서 함몰되는 개인의 권리를 되새긴다. 국가의 버팀목이란 허세는 가정의 방관자로 몰락된다. 결국 그는 ‘친구도 가족도 모두 다 잃는다’는 회한을 내뱉을 뿐이다.
16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다소 버겁게 느껴지지만 <굿 셰퍼드>는 그리 진부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충격적인 폭로가 아닌 나직한 고백은 <굿 셰퍼드>에 대한 신뢰감을 높인다.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치적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 <굿 셰퍼드>는 근래 보기 드물게 중후한 무게감을 지닌 작품이다.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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