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당신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23에 대한 의혹을 하나의 법칙으로 간주하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한다면 <넘버23>은 허무맹랑한 억지가 될 터이니.” 만약 <넘버23>을 보고자 하는 당신을 위한 지침서가 있다면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23’이라는 숫자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출발해서 그 안에서 맴도는 영화니까.
사실 <넘버23>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영화보다도 배우 덕분이다. 코믹의 한 장르가 되버린 듯한 짐 캐리가 ‘색다른 변신! 그것도 살인마!’란 식의 홍보문구로 포장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과 기대감은 한배를 탄다. <트루먼쇼>와 <이터널 선샤인>에서 보여주었던 짐 캐리의 이색적 스펙트럼은 기대감의 전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물은 기대감보단 불안감을 충족시키는 형세다. 그건 그의 연기 탓이라기보단 극 차제의 정서적 결함 탓이다.
일단 <넘버23>은 간단하게 말해 긴장감이 결여돼 있다.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들뜨는 것은 아니지만, 긴장감이 결여된 진지함은 <넘버23>을 통해 얻고자 했던 소비자의 기대심리를 지루함으로 보답한다. 물론 23이라는 숫자에 집착한 남자의 병적 집착은 관객의 심리적 공황감을 조성하고 후속 반전에 대한 분위기를 형성하려 하지만 큰 감흥에 도달하진 못한다. <넘버23>은 23이란 숫자에 관련된 우연적인 사실을 관객 앞에 늘어놓고 필연적으로 종용한다. 하지만 편집증, 과대망상, 혹은 작화증처럼도 여겨지는 윌터 스패로우(짐 캐리)의 착란 기질은 강박감 이상의 대안이 되지 못한 채, 23이란 숫자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는 꼴이다. 역사와 과학이라는 전례 안에서 23이란 숫자가 차지하는 기묘한 실례들을 풀어놓지만 다소 수다스럽게 느껴지고 설득력은 공허할 따름이다. 마치 기호학자들의 ‘아나그램(anagram)’처럼 우연 안에서 해석되는 놀라운 법칙을 빙자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는 숫자놀음의 나열 이상이 되진 못한다. 결국 이야기의 근거만 늘어놓고 이야기의 정서에는 무신경한 기분이다.
결국 영화가 드러내는 반전의 무게감은 빈약하고 문맥적으론 그럴싸하나 명료하지 않은 내러티브는 영화가 추구하는 메시지의 전달마저도 폄하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이 죄의식과 속죄라는 대명제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군더더기있는 여정은 더없이 무색해진다. 결국 <넘버23>은 관객의 심리를 흔드는 게임의 법칙에서도, 숙연한 감동을 선사하는 현학적 교훈에도 확실히 머무르지 못한다. 어쩌면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구약성서 32장 23절의 구절까지, <넘버23>이 시종일관 ‘23은 내 운명’이라 외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다만 짐 캐리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말의 위안일지 모르지만 큰 보상이 되기엔 버거워 보인다.
2007년 3월 21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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