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같은 사랑을 해도 남들과 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세상은 그들을 ‘퀴어’라 부른다. 물론 그들의 사랑도 크게 남다르지 않다. 모든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듯, 통속적이며 지극하고 애절하다. 그러나 ‘성적 소수자’라는 또 하나의 렌즈가 개입되는 순간,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들의 사랑은 남달라진다.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해 왔지만 남녀간의 사랑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던 욕망과 정치, 권력관계가 ‘퀴어’의 렌즈를 거치고 나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시선 덕분에 관계는 보다 쉽게 애절해진다. 때문에 ‘퀴어 멜로’들은 보통의 멜로영화들과 다른 결을 가진다. 관계의 정체가 보다 쉽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송희일 감독의 저예산 독립장편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바로 그 퀴어멜로다. 고아원에서 자라 서울로 상경한 수민은 낮에는 공장일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시각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고 있는 젊은 남자. 그러나 만만치 않은 세상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공장에서도 해고를 당한 그는 결국 호스트바의 선수(접대부)가 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 또 다른 남자 재민이 있다. 유약한 재벌 2세인 그는 돈과 명예, 약혼자까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단 하나 남과 다른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외로운 인물이다.
당연히, 그들은 만난다. 대리운전 기사와 손님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인으로, 그리고 다시 선수와 손님으로 만난 그들은 계급적 차이로 인해 쉽게 가까워지지 못한다. 첫눈에 사랑임을 알아본 재민은 수민을 따라 다니며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지만, 가난하고 무식한 스스로의 입장을 너무도 잘 아는 수민은 그 사랑을 내치려고 든다. 그러나 사랑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결국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고 키스를 나누고 바닷가를 거닐고 잠자리를 같이 하고 생활을 공유한다. 물론 그들의 계급적 차이로 인한 갈등은 여전하다. 감정을 공유하였으나 사회적 지위까지 공유할 수 없었던 그들은, 헤어진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당연한 일이다. 이송희일 감독 스스로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의 퀴어버전’이라고 공언하고 만든 영화이니, 캐릭터와 설정이 익숙할 수밖에 없다. 어디 70년대 호스티스 영화뿐인가. 재벌 2세와 가난뱅이의 험난한 사랑이야기는 이미 TV드라마를 통해 셀 수조차 없이 많이 보아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조금도 진부하지 않다. 익숙한 것들이 기승전결을 빼곡히 채우며 줄을 잇는데, 어디선가 봤던 닭살 대사들이 귓가를 간지르는데, 조금도 진부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후회하지 않아>가 ‘퀴어 멜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혐의를 두어 볼 수도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분명 ‘퀴어’의 렌즈를 거치는 순간 익숙해서 지나치던 것들이 좀더 날 것 그대로 잘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니까. ‘남-녀’의 구도에서 쉽게 들어오지 않던 계급과 정치의 문제는 ‘남-남’ (혹은 ‘여-여’도 가능하다) 구도에서 보다 적나라해지는 경향을 띄기는 한다.
그러나 단지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후회하지 않아>가 인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무례다. 좀더 잘 드러날 수밖에 없는 렌즈가 없다 하더라도, 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잘 만들어진 멜로드라마이며, 저예산의 한계를 작품의 완성도로 극복해낸 놀라운 결과물이다. 물론 이 놀라운 결과물은 전적으로 이송희일 감독과 캐릭터에 100% 몰입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덕분이다.
이송희일 감독은 ‘호스티스 영화’라 불렸던 기존의 멜로드라마 장르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익숙한 요소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좀더 진솔한 방식으로 관객 앞에 늘어설 수 있도록 재배치했다. 노골적 통속극의 형태를 빌려오되, 그 안에 절절한 감정과 맛깔스러운 대사를 심어 넣고 강약을 조절함으로써, 흔하디 흔한 신파로 빠지는 우를 피해나간 것이다.
웃음과 눈물을 적절히 배치한 드라마는 탄력이 넘치고,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오가는 구성은 연출의 내공을 실감케 한다. 돈을 주고 받는 관계에서 한 단계 나아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서로를 포용하게 되기까지 각자의 인물이 드러내는 외로움과 고단함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영상을 통해 충분히 묘사되고 있으며, 이는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결말의 강력한 동인이 되어 관객의 정서적 충격에 일련의 근거로 작용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둘도 없을 것 같은 개성으로 생동하는 캐릭터의 매력 또한 언급하지 않으면 섭섭한 이 영화의 매력. 재벌 2세 하면 떠올리는 ‘싸가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재민이나, 밝고 순수하지만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 용감한(그래서 가끔 무서운) 수민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전형적이지만, 절박함을 안고 있다는 측면에서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캐릭터를 살아 숨쉬는 인물로 만들어낸 배우들의 연기는 근자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반짝거린다.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도저히 미워하기 힘든 슬픈 악역을 연기했던 신인 이한은 고민 많은 재벌 2세가 되어 한계에 부딪친 사랑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송희일 감독의 단편 <굿 로맨스>에 출연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력조차 없는 신인 이영훈은 숫제 수민 그 자체가 되어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습기를 머금은 눈, 공허해 보이는 그러나 결연해 보이기도 하는 무표정과 순수 그 자체처럼 보이는 미소를 동시에 가진 배우 이영훈은 올해 한국영화가 발견한 보석 중의 하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발군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호스트 바의 마담을 연기한 배우 정승길과 적은 비중이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내비친 배우 김정화도 반갑다.
그리하여 결론. ‘퀴어’라는 렌즈를 들이대고 보건 걷어내고 보건 간에, 진솔하고 애절한 감정이 살아있는 멜로영화 <후회하지 않아>를 대하는 심정은 흡족하다. 섣부른 장담을 좀 보태어 표현하자면 지극한 호모포비아가 아니라면 누구든 후회는 하지 않을 작품.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능숙하게 바꾸어낸 감독과 배우들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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