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첨단 디지털 시대인데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고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은 현실감각이 뒤쳐진다는 이유로 세인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화만 봐도 그렇다. 화면가득 채워진 현란한 그래픽과 판타지로 덧칠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에게 평범한 영상이나 예상을 깨버린 스토리 텔링이 외면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는 좀 더 깊게 성찰하고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법도 배워야 할 것이다. 서부개척 시대가 끝났음에도 목가적 낭만을 꿈꿨던 개츠비나, 사회와 인간의 기본 규칙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레보스키 앞에 ‘위대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뜬금없이 개츠비와 레보스키를 들먹이는 이유는 <맘마미아>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볼만한 사람들은 얼추 다 본 영화를 이제야 본 것이 조금은 억울하고 그보다는 더 많은 관객들 속에서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시종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으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막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은,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한 기묘한 느낌이 장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냥 좋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이 이러할까. 「예술은 해석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순수한 경험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수전 손택의 말은 그래서 여전히 참이다.
일찌감치 <맘마미아>의 개봉을 알았음에도 기왕에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데다가 뮤지컬 영화가 큰 히트를 친 전례가 드문 일인지라 관심밖에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노래 또한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구성진 컨트리 실력을 유감없이 선사한 바 있으니 더 보여줄 특별한 게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있기도 하였다. 게다가 피어스 브로스넌과 건조한 캐릭터만 골라서 연기해온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춘다는 것은 별로 상상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마저도 미덥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한창 흥행몰이를 할 때도 인연이 닿으면 보겠지 하는 심정으로 밀쳐두었던 것이다. 건방지게도 흥행 뮤지컬에 기대어 쉽사리 돈 푼께나 만져볼 속셈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품었더랬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으니, 영화 내내 발을 구르는 등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뜨거운 어떤 힘으로부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오판은 ‘몸으로 배우고 익힌 것은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간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아바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요, 70.80년대의 숱한 밤을 지새워 공부했던 지금의 40~50대들의 뇌리에 가장 많은 레퍼토리로 남겨진 주인공이 아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20대라면 적당히 흥겨울 따름인 Dancing Queen과 Super Trouper유의 노래들이 중년들에게는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 밤새워 공부하던 학창시절과 오버랩되며 기어이 가슴 뭉클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이고, 이제는 60줄에 들어선 메릴 스트립와 두 친구의 혼신을 다한 노래와 춤 앞에서, 속절없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는 말이다. “관객의 정서적 참여를 통해 비로소 영화는 완성된다.”던 히치콕의 선언처럼 <맘마미아> 역시 관객과의 호흡을 발판으로 그 가치를 선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충분해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맘마미아>의 주인공은 I Have a Dream에서 Waterloo까지 장면마다 상황마다 이어지는 아바의 음악이다. 7080세대에게 ABBA라는 이름은 보통명사 이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아바의 노래는 저마다의 취향을 초월하여 70~80년대 팝의 입문서와도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어떤 이는 이글스를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존 덴버를 좋아하며 소수의 다른 이들은 섹스피스톨이나 혹은 예스, 핑크플로이드 유의 음악을 좋아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바는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늘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수였다는 것이다. 한 때나마 LP음반을 모은 사람치고 아바의 음반 한 장 안 가진 이가 있었던가? VOLVO를 제치고 77년도 스웨덴 수출 1위에 오른 상품이 ‘아바’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멋진 풍광과 어우러진 군무와 코러스 장면들은 영화의 감흥을 배가시켜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Dancing Queen이 흐를 때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도나의 모습과 결혼식 전야 파티 시퀀스에서 나는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단 하루만 공연합니다. 숨이 차서 장기공연을 못 하거든요”라는 소개와 함께 등장한 ‘도나 앤 다이나모스’가 Super Trouper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지금은 사라진 종로 피카디리극장 옆 SM커피숍에서 보았던 아바의 공연실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자신의 심정을 뒤늦게 전달하는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 이 노을 진 에게海를 배경으로 흐르는 장면 또한 백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바의 원곡에 비해 다이내믹한 느낌은 부족할 지라도.
그러나 추억이 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동시대성과 정서적 일체감 없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노릇일 터. <맘마미아>가 한국관객에게 어필한 이유 또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딸의 결혼식이라는 집안 공적행사에 끼어든 엄마의 비밀스런 과거담으로 인해 흥미진진해진다는 설정. 게다가 추억의 음악까지 한몫 거드는 데야! 그런 점에서 <맘마미아>가 보여주는 가족이야기는 일견 특별해보일 수 도 있겠으나 기실 우리 정서와 별다를 게 없음이 발견된다. 그러니까 소피의 결혼식에 모여든 세 명의 옛 연인과 하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게 한국의 집안대소사에서 보여 지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힘든 시절, 절망 가득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따뜻한 가정과 가족이야말로 힘든 어려운 시대를 버텨내는 힘이자 원동력이 아니던가. 또한 고난의 시절을 극복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로써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추억이 한 축을 담당한다는데 이의가 없다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대에서 탈주하고 싶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는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하는 첫 번째 세대인 7080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 지경이다. 이제야말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시기임에도 너무 일찍 격전장에 뛰어들었던 386은 무능의 상징으로 추락했고, 정권교체를 통해 복귀한 50대들은 구태와 보수의 이미지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보편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줄곧 정치 사회 문화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러온 이들에 국한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터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중년들은 여전히 순수한 사랑의 힘을 믿고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며 문화와 자유를 사랑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맘마미아>의 힘은 중년관객들을 20여 년 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시절로 데려다줌으로써 힘든 현실을 잊게 하는 최면효과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영화가 그 사회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맘마미아>의 성공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공허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그 무엇이 필요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맘마미아>는 상당한 미학적 고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요 놀라우리만치 빼어나다고 보기 힘들지는 몰라도, 적어도 근래 우리에게 찾아온 영화들 가운데 중년 관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요컨대 어떤 세대보다 정치적이면서 낭만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제는 현실의 삶으로 삼투했으나 여전히 존재증명에 목말라하던 중년들에게 찾아온 <맘마미아>는, 그래서 더욱 각별하고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때론, 영화에서 이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