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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안개에 가리워진 희망... 모래와 안개의 집
ldk209 2008-10-15 오후 8:10:53 1373   [2]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안개에 가리워진 희망...★★★★

 

바딤 페렐만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인 <인 블룸>은 최근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 중 한편이었다. <인 블룸>을 본 이후 감독의 데뷔작을 보기 위해 <모래와 안개의 집>의 DVD를 구입, 관람한 결과, 역시 바딤 페렐만 감독의 영화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믿음이 적중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그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감정이 느껴지는 영화보다는 보고 나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감정이 확장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이 슬픈 감정이든, 공포든 관계없이.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아이 앰 샘>보다는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저려오는 <판의 미로>가 오히려 더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인 블룸>도 그랬다. 결말에서 ‘어... 저게 뭐지?’라며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해지는 느낌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보니, 몇 가지 점에서 <인 블룸>과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고, 비극적인 이야기임에도 화면은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같은 장면이 도입부와 결말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영화 <파이란>의 리메이크작에도 이와 같은 특징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의 마지막 최민식과 류승범의 권투 경기는 관객을 매우 곤란한 입장으로 밀어 넣는다. 만약 영화가 최민식의 삶만을 보여줬다면 우리는 류승범을 ‘새파랗게 어린 양아치 새끼’라며 미워했을 것이고, 류승범의 삶만을 보여줬다면 우리는 최민식을 ‘한물간 퇴물, 저질 선수’라며 비난했을 것이다. 즉, 우리 편은 좋은 편인 것이다. 그러나 둘 모두에게는 이겨야 할 이유가 있고, 둘 모두는 정의다. 관객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더욱 곤혹스럽다.

 

<모래와 안개의 집>은 <주먹이 운다>보다 더욱 비참하며 결말도 파국으로 치닫는다. 한 채의 집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캐시(제니퍼 코넬리)와 베라니(벤 킹슬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걸고 이 집을 지키려 한다. 둘 모두 이 집에 가족의 안위가 달렸고, 둘 모두는 선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대게는 이렇다. 계급적이거나 역사적 문제가 아닌 다음에는 선과 악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대결이란 영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대게의 보통사람들은 옆 가게보다 내 가게가 잘 되는 것이 선이고 정의인 것이며, 여기엔 철저하게 주관적 기준만이 작용한다. 내 가게가 꼭 잘돼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옆 가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분쟁의 한 쪽 당사자인 베라니는 1970년대 말 이란 혁명에 쫓겨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망명 온 전직 대령이다. 이란에서는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나 미국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베라니는 일이 끝나면 깔끔한 양복으로 갈아입고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존심을 곧추 세운다. 과중한 집세에 시달리던 베라니는 신문에 난 주택 경매 광고를 보고는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멋진 주택을 헐값에 사들인다.

 

베라니가 사들인 주택은 분쟁의 다른 쪽 당사자인 캐시의 저택이었다. 아버지가 30년 동안 노력해 마련한 주택을 캐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잘못 부과된 고지서 때문에 날려 버렸다. 그녀는 뒤늦게 변호사를 찾아가서 호소해보지만 해결이 쉽지만은 않다. 이 문제는 지방정부의 잘못된 세금부과와 고지서 한 번 뜯어보지 않은 캐시의 무관심-이혼으로 인해 피폐해진 그녀의 삶-이 결합되어 낳은 비극이다. 이 둘의 분쟁에 결혼 생활에 지쳐 캐시에게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보안관 레스터(론 엘다드)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 꼬여만 간다. 캐시와 레스터는 실패한 결혼생활을 접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 하는 중이다.

 

이들 모두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선이고 정의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또 이들은 모두 선인 동시에 사회에서 수용 가능할 정도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이익을 챙기려 한다. 베라니 대령은 헐값으로 집을 구매하자마자 네 배에 달하는 과다 이득을 취하려 하고,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억압적 가부장이다. 캐시는 착하긴 하지만 무책임한 성품에 보안관인 레스터의 지위를 활용, 집을 되찾으려 한다. 레스터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약간의 편법을 동원한다. 올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적일 수도 있는 이들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은 돌이킬 수없는 파국을 가져온다. 이런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주택이 가장 대표적인 부의 증식 상품으로 언론에서조차 권장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일원이라면 비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또 하나의 문제를 던져주는데, 그건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다. 사람들은 베라니 대령을 미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이란인일 뿐이고, 그런 편견은 베라니의 이름을 계속 틀리게 발음하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레스터는 심지어 아들 이스마엘의 이름조차 틀리게 발음한다. 베라니 대령은 ‘나는 미국 시민이다’고 강조하지만 왠지 모르게 허무한 구호로 들린다. 이 부분을 보면서 KBS의 <러브 인 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다문화 사회를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결혼해서 한국에 산지 오래된 주부들에게도 ‘외국인 주부’라는 호칭을 당연하다는 듯이 반복한다. 아마 그 주부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지, 또는 얼마나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평생 ‘외국인’이라는 호칭의 테두리에 갇혀 지내게 될 지도 모른다. <러브 인 아시아>같은 선한 목적의 프로그램에서조차 이런 식의 편견을 만나게 되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보면 대표적인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조차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캐시는 베라니와의 분쟁에 별다른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고 레스터마저 흔들리자 절망감에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급작스럽게 마치 동화 같은 결말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어쩌면 베라니와 캐시, 그리고 레스터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 대한 오해와 약간의 이기심은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모두가 불행한 결말은 있어도 행복한 결말은 없었던 것이다.

 

※ 이 영화에는 상당히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미국의 폭력성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있는데, 레스터에 의해 화장실에 갇힌 베라니는 아들 이스마엘에게 말한다. “경찰의 말에 순종해라. 왜냐면 저 경찰은 총이 없으면 겁쟁이란다. 겁을 먹었기에 위험한 존재란다” 이와 비슷한 시각은 Michael Moore 감독의 <Bowling for Columbine> 내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이 영화는 촘촘한 드라마와 함께 배우들의 연기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벤 킹슬리, 제니퍼 코넬리는 물론이고, 이란 출신의 쇼레 아그다쉬루는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옥상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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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안개의 집(2003, House Of Sand And 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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