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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봤습니다.
아, 역시 나홍진은 야심만만하군요.
"살인의 추억"만큼 몰입도 깊고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만큼 강렬합니다. (크게 잔인하진 않습니다.)
별점 : ★★★★★
* 아래부터 스포 있습니다.
1. 오감도
"곡성"이 뛰어난 이유는 공포의 근원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상의 "오감도"입니다.
오감도(烏瞰圖) - 이 상 - | | | 시 제 1 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 | | |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조선중앙일보>(1934) - |
이 시는 제가 지금까지 본 모든 텍스트 중에 가장 무서운 텍스트 중 하나로 꼽고있습니다.
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1) 13명의 아해(아이)가 도로를 질주합니다. 이 아이들은 "무서운 아이 - 공포감을 주는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2) 그런데 시에서는 공포감을 주는 아이가 1아이건, 2아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3) 즉 13명의 아이들은 공포감을 주는 어떤 아이가 두려워 달립니다. 그런데 소름돋게도 공포감을 주는 아이도 같이 달리고 있고, 심지어 무서워하는 한 아이가, 누군가에게는 공포감을 주는 아이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 계속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적이 구분이 안 가는 완전한 카오스상태입니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4)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시가 끝나게 됩니다.
5) 그리고 이 "오감도"가 주는 공포가 바로 "곡성"이 관객에게 주는 공포감과 비슷한 것입니다.
차례대로 혼돈, 의심, 절망입니다.
2. 해석
1) 전반부 - "혼돈"
마을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람들이 "미칩니다" 나홍진은 하고 많은 요소 중에 "미친다"는 요소를 택했는데, 현명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적보다, 완전한 우리편인 줄 알았던 "가족"이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때 더 큰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죠.
곡성에서는 이 가족끼리의 살인이 유난히 많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리고 무섭게도, 영화 끝까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원인도 모르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미쳐서 나를 죽이려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면서 느끼는 정서적 위협과, 생명의 위협을 동시에 느낍니다. (극 중 효진이의 광기가 섬뜩한 것처럼) 참으로 어마어마한 공포입니다.
이제 종구(곽도원)는 미칠 수도 있는 딸을 구해야 하는데, 유력한 용의자인 일본인(쿠니무라 준)은 "정체를 모를 자"입니다.
나홍진은 이처럼 "혼돈", "불확실"로 줄 수 있는 공포감을 최대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혼돈은 의심을 낳습니다.
2) 중반부 - 의심
미쳐버린 딸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외부에서 일광(황정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모든 불확실과 두려움, 혼돈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제시됩니다.
놀랍게도 일광은 장독대 안에 있던 죽은 새를 단번에 알아맞히고, 종구가 누굴 만났는지 또한 알아맞힙니다.
이렇게 관객과 종구는 드디어 이 미스터리로부터 구출해줄 일광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고, 일광의 굿을 통해 혼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의심이 시작됩니다.
외지인은 이상하게도 닭을 사면서 흥정을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종구 일당들을 피해 달아나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인간처럼 고통스러워 하죠.
그리고 정체가 아직 확실치 않은 외지인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증언자였던 무명(천우희)가 종구 뒤에서 오묘하게 그 상황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관객은 두 가지 의심이 들게됩니다.
1) 외지인은 혹시 무고한 것 아닐까?
2) 무명이 혹시 모든 사건의 진짜 원인 아닐까?
이제 관객은 슬슬 불편해집니다.
외지인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했고 마침내 죽였는데, 정말 그의 짓인지는 석연치 않고, 무명의 정체 또한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범인은 따로 있는데 정말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 아닐까? 라는 의심이, 관객을 영화에 더욱 집중하게 만듭니다.
한편 일광은 밤에 다시 한 번 종구 집에 들르려다가, 무명과 마주하여 코피와 구토를 하며 홀리듯 도망치게 됩니다.
이제 여기에서 관객의 의심은 혼란에서 확신으로 바뀝니다.
무명은 사람이 아니다. 이 모든 건 무명짓이었다.
그러면 관객은 이제 다 나은 줄 알았던 딸 효진 또한 다시 의심해야 합니다.
일광은 차를 급히 돌리고, 종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내가 큰 실수를 해버렸구먼. 살을 잘못 날렸어. 그 외지인은 귀신이 아녀. 나랑 같은 무당이제. 원흉은 따로 있어. 그 무당은 다른 귀신을 잡으러 온 거여."
"....그 다른 귀신, 혹시 여자요?"
"..! 그렇제."
"젊은 여자? 하얀 옷에?"
"자네, 봤는가?"
"나랑 있소."
"......."
"......."
"절대로, 절대로 현혹되지 마소!!"
3) 절망
이제 종구는(관객은) 선택을 해야합니다. 무명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일광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슬슬 나홍진 감독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마침내 스물스물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건 바로 종구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딸을 잃을 수도, 구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둘 중(무명과 일광 중) 하나는 딸을 살릴 수 있고, 하나는 딸을 잃는 절망적인 선택이라는 것 뿐입니다. 이해 가시나요? 너무나 섬뜩하고 불편한 상황입니다. (관객은 여기에 그 불편함과 긴장이 같이 몰입됩니다.)
그리고
종구는 끝내 무명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달은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은,
무명은 결국 종구를 도우려던 신이었으며, 교차편집을 통해 외지인이 실제로 악마임이 드러나고, 구원자인 줄 알았던 일광은 외지인과 한패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종구는 외지인에게 딸을 당했고, 일광에게 속았고, 무명을 믿지 못해 자신의 선택으로 딸과 가족을 잃게 됩니다.
일광은 유유히 사진을 찍어 떠나고, 종구는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립니다.
4. 피해자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가 메가토크에서 말했듯, "피해자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에서 종구로 표현됩니다.
종구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 수가 없죠.
나홍진 감독은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거대한 불행은 가끔 그 원인이 우리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지요. (종구는 자신의 삶을 덮치는 비극의 원인도 알 수 없고, 최선을 다해도 결국 막아내지 못합니다.)
즉,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 거대한 불행이 언제, 어떻게, 왜 올지도 모르고 (효진이 왜 미쳐버렸는가에 대해, 왜 외지인이 효진을 택했는가에 대해 명확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불편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는 맥카시 각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영화에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다니는 안톤쉬거가, 곧 자신이 죽일 피해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니가 따르는 규칙은 도대체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냐?" 그리고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이 만든 규칙은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 운명에 휩쓸려갈 뿐입니다. (더불어 맥카시의 또 다른 영화 "카운슬러"란 영화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즉 "곡성"은 믿음과 의심, 그 어떤 힘으로도 소중한 것을 지켜낼 수 없었던 종구의 이야기를 통해
"불행은 우리가 그 원인이 아님에도, 우리를 집어삼키는 파국을 만들어낸다." 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음주운전으로 우연히 죽은 남자는 자기 잘못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5. 그 밖에
Q : 일광에 대한 복선은 어디어디 있는가? A : 1) 일광이 옷을 갈아입을 때 보았던 혼도시(일본 팬티). 그런데 이 혼도시가 기가막힌게, 외지인과 한패라고 볼 수 있는 복선도 되지만, 일광이 "나와 같은 무당이여!" 라고 말할 때 근거가 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즉 관객이 혼도시를 봤더라도 일광의 저 대사를 듣고 일광이 적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죠. (역시 나홍진은...)
더불어 일광이 장독대 안의 죽은 새를 알게된 이유나 종구가 외지인을 만났다는 것도, 외지인과 한패여서 그가 일광에게 미리 알려줬다면 아귀가 들어맞는 것입니다.
2) 제삿상 다 나은 줄 알았던 효진이가 누워있던 방. 제삿상 비슷한 곳 머리맡에 효진이가 누워있는데, 초반에 나왔던 피해자들 집에서 모두 그 제삿상이 차려져있었죠.
즉 그 제삿상은 효진이를 미치게 만들어 가족을 죽이게 만드는 마지막 장치였던 셈입니다.
Q : 한 패라면, 일광이 날린 살에 왜 외지인은 아파했는가? A : 일광은 외지인에 살을 날린 것이 아니라 종구의 딸 효진이에게 날린 것입니다. 그러나 종구가 그것을 막게 되죠. 외지인은 박춘배를 좀비로 변신시키기 위해 과하게 굿을 하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홍진은 처음부터 둘이 한 패였다는 설정으로 찍었다고 합니다.)
Q : 누가복음 서문은 왜 나온 것이며 어떤 의미인가? A : 먼저 누가복음 원문입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나홍진 감독이 메가토크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이 서문은 외지인과 성당의 부제의 대화를 위해 큰 쓰임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2시간 30분간 믿음과 의심에 대해 관객에게 보여주고 다시 서문을 외지인이 읊조리게 만들면서 관객에게 선택지를 주고 싶었던 것이죠.
즉
예수 흉내를 내며 악마가 부제를 위협해, 부제가 "주여"라는 구원의 외침을 뱉은 것인지,
아니면,
메시아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내려와 누가복음을 말해서, 부제가 신에 대해 "주여-"라는 경배의 외침을 뱉은 것인지.
를 말입니다. (두 번째 선택지가 참 섬뜩하지 않나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의하면,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찾고자 종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종교가 주는 해답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이신론. 신은 둘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 둘 다 존재 하기 때문이다.
2. 일신론. 세상은 하나의 절대신으로 되어있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입니다.
하지만 일신론과 이신론은 각각 논리적 난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신론은, "선과 악의 신이 각각 있다면, 그 둘을 창조한 신은 누구인가?" 는 물음에서 답을 할 수 없게 되고,
일신론은, "자유의지를 주어 악을 선택하여 고통받게 될 것을 절대신은 알고 있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왜 그를 창조했는가?" 라는 물음에서 답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한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일신론 -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악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지인을 비롯해 무명이라는 신도 나온다는 점에서 나홍진은 보다 "이신교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나홍진은 결코 하라리가 말한 논리적 방법을 제시한 게 아닙니다. (예수가 악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무명이라는 다른 신이 나오지 않았겠죠.)
* 기독교나 일신론적 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간혹 불편하실 수도 있겠네요.
각설하고, 서문은 이것의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홍진은 "만약 동굴에 들어간 것이 종구였다면?" 이라는 질문에, "그러면 서문은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굴씬은,
"불행은 우리가 그 원인이 아님에도, 우리를 집어삼키는 파국을 만들어낸다"
는 나홍진의 주제의식을 더 극대화 해주는 (왜냐면 신이 악마니까)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Q : 무명은 누구인가? A : 마을에 있는 토속신으로 설정했다고 합니다. 원래 더 많은 씬이 있었는데 무명의 카리스마를 위해 최대한 편집했다고 하네요.
Q : "닭이 세 번 우는 것"의 의미는? A :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할 때의 모티프입니다. 여러모로 종교적 색채를 지울 수 없군요.
Q : 무명이 갖고 있던 머리삔, 야상, 가디건의 의미는? A : 모두 피해자들이 입고 있던 것입니다. (박춘배 야상, 작부의 가디건, 효진의 머리삔) 종구는 그것을 보고 무명이 원흉이라 생각하지만, 아마 그것들의 의미는,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무명의 의도이거나 피해자들을 미리 감지하고 위험 신호를 보내려는 무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Q : 왜 무명은 종구의 물음(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거야?)에, "니가 의심했잖여"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였는가? A : 사실 논리적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대답입니다. 먼저 발생한 것은 사건이고, 종구는 그 후에 외지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종구의 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지인이 악마로 나와 고라니를 뜯어먹는 꿈을 종구가 꾸게되죠.
이 때부터, "외지인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그에게 생기게 됩니다. 일종의 선입견이 생기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사건으로 향하는 촉매제가 된 것입니다. 즉 외지인에 대한 생각과, 외지인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되었기 때문에 종구가 일련의 사건을 겪게 된 것 - 이라고 무명이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나홍진이 말했듯, 주제의식이 엄연히 "불행은 자신이 그것을 초래하지 않고도 파국을 만들어낸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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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정말 잘못도 없이 파국이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참으로 섬뜩한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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