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Classic이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 위기에 허우적거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행한 인간의 단면들과 그의 선택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자신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의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한 인간을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했을 뿐, 그 이상도 아닌 그냥 잘 사용할 도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 인간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경멸했을지 모르는 불행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참 이해된다. 인간은 어차피 환경의 동물이니까. ‘신세계,’ 영화 제목이 참 의미심장했다. 낙원이란 의미로 잘못 해석될 수 있었지만 결과는 ‘실낙원’이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른 세계라는 의미일 뿐,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새로운 세계로 향해야 하는 보호받지 못한 인간의 슬픈 뒷모습이 보인다. 영화는 그렇게 비운의 찬 결말을 향해 간다. 세상일이 다 그런가 보다. 비극이다. 그런데 그 비극을 만드는 이들이 바로 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런 비극의 원인이 인간이면서 그런 인간을 만든 것은 편리하게 타인을 이용하려는 비열함과 잔인함이 숨어 있다. 특히 사회적 정의를 지키라고 만든 직업인 경찰들이 그런 비열함의 주범이란 것, 자주 본 구성이지만 신세계라는 영화 속에서 봤을 때, 그 잔인함은 매우 커 보였다. ‘최민식’이 보여주는 ‘강과장’의 모습은 그게 자신의 일이라는 말 속에서 극명해진다. 일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경찰의 모습, 그는 분명 한국사회에서 넘쳐나는 인간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인 폭력적이고, 사악하며, 동시에 사회의 적인 깡패 사회 속에서 인간미가 보였다. 영화 속 구성이란 생각은 든다. 그렇게 해야 영화가 더 재미있을 것이며, 동시에 수준도 높아질 것이란 생각은 든다. 하지만 강과장과 대비되는 ‘정청(황정민 분)’의 마지막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신을 오랫동안 함께 해준 동생 ‘brother’를 위해 선택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영화 속 수많은 압권 중의 압권일 것이다. 배신감이 들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배신감에 기인한 피의 집행을 하지 않았다. 용서라고 해야 할까? 용서일 것 같다. 결국 오랜 만남과 고마움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면서 감동적인 것이리라. 누군가를 도구로서만 이용하려는 계산적 인간과 오랜 인간관계로 인해 갖게 된 애정으로 충만한 인간적인 인간은 이 영화의 중반부터 격렬하게 충돌한다. 그리고 그런 충돌 속에서 자신의 기묘한 정체성과 삶의 모순 속에서 방황하는 경찰이자 조직 폭력배의 중간 보스인 ‘이자성(이정재 분)’의 고뇌는 모든 인간이 겪는 고뇌를 연상한다. 매번 선택해야 하지만 그 선택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이자성은 강렬하게 보여준다. 선택, 그런 것이다. 결국 하나 밖에 없는 돌파구만 존재할 때, 그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사실 선택이라기보단 피치 못할 길일 뿐이다. 이자성의 마지막 모습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자기를 반겨줄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과연 그곳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줄 공간도 안 되며, 결국 그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반겨줄 신세계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해진다.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그곳, 신세계에서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먹먹해졌다. 그리고 한국 영화의 수준도 확인했다. 영화 속 연기자들의 화려한 연기는 더 이상 말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원래 뛰어난 그들이니까. 도리어 그런 배우들을 맘껏 부린 감독이자 각본을 담당한 ‘박훈정’의 뛰어난 능력을 칭찬하고 싶다. 그의 기막힌 세계로 인해 하나 이상의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신세계’란 이 영화, 언젠가 한국 최대의 Classic이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평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이번 작품에 참여한 이들이 다시 뭉쳐 또 다른 걸작을 만들었으면 한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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