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덜 다듬어진 블랙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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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Soul's FILM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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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일 악인이지?’ 영화 [분노의 윤리학] 포스터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홍보 문구만을 놓고 보면 악질 중의 악질 캐릭터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 영화인가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영화는 블랙 코미디물. 영화를 보자마자 ‘홍보 잘못했네’ 하는 생각이 단박에 든다. 영화는 처음, 관객을 향해 ‘누가 제일 악인이지?’ 묻지만 어느새 질문한 사실 조차도 잊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우문을 잊은 지 오래, 누가 제일 나쁠까를 가리려 들어갔다 이상하게 웃음보가 먼저 터져버린다. 스릴러인척 했던 블랙 코미디 [분노의 윤리학]. 아직 덜 다듬어진 느낌이 있지만 신인 감독의 데뷔작임을 감안하면 꽤 선전한 듯 보이는 작품이다.
여대생 진아(고성희)가 살해된다. 빚을 갚기 위해 룸살롱에서 일하던 호스티스, 대학교수의 불륜 상대이며 옛 애인의 스토킹 대상이던 그녀가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한다. 그녀의 죽음에는 네 명의 남자가 얽혀 있다. 옆집에 살며 그녀를 도청하던 경찰 정훈(이제훈), 그녀를 스토킹하는 옛 애인 현수(김태훈), 그녀에게 삼촌 행세를 하며 빚 독촉을 일삼는 사채업자 명록(조진웅)과 그녀의 불륜상대인 교수 수택(곽도원). 네 명의 남자는 자신이 진아를 죽이지 않았다고 잡아떼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모두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죄를 자기합리화란 장치로 덮는 사람들. 네 사람 모두 진아의 죽음에 슬퍼하기는커녕 억울함을 호소하기에만 급급하다.
추리는 필요없다. 영화는 진아를 둘러싼 네 남자의 캐릭터, 그들의 죄질 그리고 그 중 누가 살해범인지를 미리 답안지 들춰보듯 친절히 설명한다. 네 명의 캐릭터는 환풍기를 통해 수시로 교차되며 각각의 에피소드는 주된 캐릭터의 관점마다 쉼 없이 재구성된다. 문제는 이러한 연출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는 데에 있다. 일일이 캐릭터와 사건을 설명해주니 이해하기는 빠르고 쉬운데, 집중력과 긴장감은 갈수록 떨어진다. 하나의 범죄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말 그대로 머리 쓸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연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관객은 서서히 추리할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눈이 가는 대로 귀가 열리는 대로 보고 듣는다. 감독이 이를 의도한 걸까? 스릴러 모양을 내는 지루한 초반이 지나가면, 중반부터 블랙 코미디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명록(조진웅) 캐릭터의 등장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그의 등장 이전이 음울하고 지루한 캐릭터 소개에 그쳤다면 그의 등장 이후는 가열한 모양새의 블랙 코미디가 새로이 판을 짠다. 명록은 등장하는 동시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희노애락 중 어떤 감정이 가장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며 묻고 나서 그럴듯한 궤변을 섞어 분노의 윤리학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모든 감정 중 분노가 가장 우위에 있으며 이를 다스리면 만사가 편안하다는 그의 생각.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 작은 일에도 분노하는 그의 모습은 아이러니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처럼 영화는 코믹적인 부분에서는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애초에 물었던 ‘누가 제일 악인이지?’에 대한 이야기는 잘 전달하지 못한다. 네 명의 악인을 같은 저울에 올려 높고 심판하기에 캐릭터가 가진 악행의 증거가 불충분하다. 달리 말하면 각 캐릭터가 단 한가지의 설정만을 우기고 있는 것이다. 도청을 한 정훈이 알고 봤더니 더 심한 범죄를 저질러 진아를 괴롭혔다거나, 진아와 불륜을 저지른 교수 수택에게 또 다른 불륜 상대가 있었다는 등의 악행이 추가된다면 조금은 흥미롭게 그들을 심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가 제일 악인인지?’라는 우문에 답도 우답이 된 꼴. [분노의 윤리학]을 잘 짜인 캐릭터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운 대목이다.
충무로의 ‘신 스틸러’를 죄다 갖다 쓴 [분노의 윤리학]은 예상대로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대부분의 웃음을 책임지는 조진웅을 선두로, 문소리, 이제훈, 곽도원, 김태훈의 순으로 호연의 순위를 정할 수 있다. 곽도원을 제외한 네 명의 배우가 모두 모여 있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상황설정과 대사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선혈과 함께 이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터지는 깨알 같은 코미디. 명배우들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분노의 윤리학]을 보고 문득 [시실리 2km], [차우], [점쟁이들]을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떠올랐다. 그만큼 [분노의 윤리학]이 표현한 코미디가 기존 한국 코미디 영화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연출한 박명랑 감독이 제 2의 신정원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확실한 건 박명랑 감독의 다음 작품은 [분노의 윤리학]보다 더 재밌고 세련된 모습으로 나올 거라는 것. 희망의 싹을 본 것으로 일단 만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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