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미나 레자의 유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 <대학살의 신>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연극 무대를 그대로 영상으로 촬영한 듯 한 느낌을 줍니다. 러닝 타임 내내 중산층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쉴 새 없는 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밀폐된 공간에서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이지만, 감독의 개성보다는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이는 연극적인 발성을 바탕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어느 날 오후. 학교 앞 공원에서 11살 재커리는 친구들과 다툼 중 막대기를 휘둘러 이턴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린다. 아이들 싸움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재커리의 부모인 앨런, 낸시 부부가 이턴의 부모인 마이클, 페넬로피 부부의 집을 방문하고, 영화는 바로 이 네 명의 성인들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교양과 예의를 갖추며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처음의 고상함은 온데 간데 없이 본 모습을 드러내는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는 원작의 분위기를 성실히 재현합니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 들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클로저>나 <다우트>를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 묘사되는 공간의 다양성으로 인해 영화로 옮겨지면서 상당히 입체적인 느낌을 풍겼는데요. 반면에 이 작품은 모든 이야기가 앨런의 부모님의 집 거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장실, 부엌 등으로의 이동을 제외하고는 동선이 일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인물의 동선에 따른 카메라 워크와, 과장된 몸짓 및 표정의 클로즈업을 통해 영화적인 특징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연극적인 특성이 훨씬 강하기에 관객들은 마치 연극 한 편을 영상을 통해 감상하는 느낌을 자연스레 가지게됩니다.
또한 네 명의 개성 있는 캐릭터가 한정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에서의 실험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조지 짐바르도 교수가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을 부여하고 진행한 실험이나, 알랭 레네의 영화 <내 미국 삼촌>에서 인간을 실험쥐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처럼, 영화 <대학살의 신>은 어빙 고프만의 <일상생활에서의 자기 표현>을 전적으로 실현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인생을 하나의 역할놀이이자 연극에 비유했던 어빙 고프만처럼, 이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이 마치 특정한 캐릭터를 부여 받아 연기를 하고, 관객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말꼬리를 잡고 공격하며 조롱하는 데 희열을 느끼는 앨런, 최대한 예우를 지키는 듯 하지만 명품 가방에 집착하는 속물성을 드러내는 낸시, 예술과 고상함으로 무장하지만 다른 이의 아픔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페넬로피, 그리고 중산층이지만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 대한 열등의식을 드러내는 마이클 등 각기 성격이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입체적인 대사와 캐릭터 묘사를 통해 생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생함은 배우들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데요. 이런 종류의 영화는 배우의 연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배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내로랄 하는 배우들은 연극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서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페넬로피를 맡은 조디 포스터와 앨런 역의 크리스토퍼 왈츠 역할에 좀 더 눈이 갔습니다. 이 영화는 캐릭터의 모습과 관객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페넬로피의 모습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우면서도 페넬로피에 더욱 이입하면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케이트 윈슬렛이 맡은 낸시 역은 다소 아쉬웠는데요. 이는 연기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네 캐릭터 중 가장 평면적으로 묘사된 데 따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대학살의 신>은 이들의 대화에 잠깐 등장합니다. 제목을 통해 관객들의 관심을 자아내지만 막상 영화에서 중요 소재로는 기증하지 않는 맥거핀으로 기능하는데요. 앨런이 대화를 하던 중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살의 신이라는 말을 꺼내고 우리 모두에게는 대학살의 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결국 인간이 허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반증하는데요. 사회생활을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긴 채 가식으로 위장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마치 이것이 ‘인간의 성숙을 재는 척도’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영화 <대학살의 신>은 제한된 공간에서의 대화를 관찰함으로써 관찰자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적 실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