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느가 사랑하는,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펼치는 홍상수 감독의 12번째 영화 "북촌방향"이 개봉했다. 이번에도 시나리오 없이 촬영이 시작되었고 하루하루 생각나는 대로 끄적인 대사들이 배우들에게 내밀어 졌다.
모델은 미소나 포즈를 취한 상태에서 사진에 찍히는 것이 아니라 셔터를 누르기 직전에 그것들을 만들어 낸다. 홍상수 감독의 배우들은 시나리오 없이 촬영장에 오기 때문에 스크린에 잡힌 배우 들의 대사나 표정은 죄다 갓 잡아 파닥거리는 생물처럼 싱싱하고 날스럽다. 특히 배우들이 다 모인 김에 생각나서 찍어 봤다고 고백한 "밤새 술쳐마시고 새벽에 택시 잡는 장면"은 이러한 즉흥성과 우연이 만들어낸 보기 드문 명장면이다.
홍상수 감독은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캐스팅을 하기로 유명하다.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스스로 생소한 자신의 연기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어서 다음번에도 자연스럽게 불러주기만하면 노개런티 로 출연하게 된다고 한다. 이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깜짝 등장하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거물급 여배우는 촬영 전날 밤에 출연 제의를 받고 중요한 스케쥴을 취소하면서까지 다음 날 나와서 다른 배우들을 경악케 했다고 한다.
"하루하루 생각난 것들로 찍어 나가는" 홍상수 식 영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관객들은 '이게 무슨 영화냐' 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이제 "홍상수" 라는 이름은 전문가들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끝어내는 브랜드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 열번째 영화 "하하하"로 부터 급격히 관객들과 친해진 그의 스타일은 [북촌방향]에 이르러 "친하지만 할말은 다 하는" 자연스러움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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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네 편이나 감독했지만 지금은 지방대 영화학과 교수로 초라해진 성준(유준상)은 무슨 바람에 실려 왔는지 서울 삼청동 골목 익숙한 풍경 어귀에 다다르자 이렇게 중얼댄다. "영호(김상중) 형만 만나고 조용히 서울을 빠져나갈거다. 한 새끼도 만나지 않을거다"
인사동-삼청동-가회동-북촌으로 이어지는, 서울서 가장 오래된 골목을 맴돌다 영화과 학생 셋과 우연히 술자리에서 합석한 뒤, 해 떨어지기도 전에 인사불성이 된 채 인사동을 떠나 고덕동 옛 애인 경진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예외없이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의 추태는 여기서도 이어진다. 여자 앞에서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크게 둘중에 하나다. 뭔가 크게 잘못했거나 모성애를 자극해서 여자의 가슴팍에 파묻히고 싶거나. 그래서 남자의 눈물은 추하다.
비 맞은 개가 구멍을 찾듯, 취한 성준은 경진의 사타구니와 젖가슴을 찾는다. 그것도 추하디 추한 눈물과 취한 눈동자를 히번뜩 거리면서. 정말 편안한 차림 - 입은 사람이 느끼기에 가장 편한 옷은, 만지는 사람이 느끼기에는 가장 흥분되는 옷이다 - 을 하고 있던 경진은 울며 매달리는 성준에 치를 떨면서도 못이기는 척 몸을 내맡긴다.
남자가 여자를 원할때 쏟는 온갖 노력과 호소는 그 순간 참으로 절박하기때문에 여자들은 또 속아 넘어가고, 원하는 것을 얻은 성준은 바로 뒷수습에 바쁘다. "다시 시작해봐야 또 우리의 끝은 뻔해. 알지?" 한 새끼도 만나지 않겠다던 성준은 그렇게 잠시 개새끼가 되었다가 슬그머니 다시 영화의 배경인 "북촌방향"으로 복귀한다.
결국 그는 영호형을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성준과 영호가 함께하는 술자리에는 미모의 여교수이자 영호의 후배인 보람(송선미)과 술집 여주인 예전(김보경), 그리고 성준의 첫 감독 데뷔작의 주연이었던 중원(김의성)이 끼게 되고 매일밤 술자리는 이어지는데...
스토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의문을 갖게 만드는 잡기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시키고 매번 새롭게 변주되어지는 반복은 오히려 점점 더 큰 폭소로 이어진다. 마치 하나의 멜로디를 반복하지만 처음에는 악기하나로 시작해서 반복때마다 악기를 늘려가다가 폭발적인 연주로 끝이 나는 "볼레로" 와 견줄만 하다.
주인공 성준은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필연이라고 느끼는 것은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을 그르치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우연의 힘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의 별 볼일 없어진 처지 또한 그런 탓으로 돌리는 듯 하다. 성준은 밤에는 북촌 술집 '소설'에 일행을 데리고 나타나 여주인 예전(김보경 역) 을 꼬시기위해 호시탐탐 안절부절 애를 쓰고, 낮에는 우연히 자꾸 만나지는 여배우에게 너무 조급하게 살지말라고 당부 말한다. "쥐어짜내 봤자 하루밖에 안나온다"는 아주 근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서.
북촌에 머무는 며칠 동안, 예전에 알았던 배우를 우연히 만나 욕을 얻어먹고, 같은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세번 만나고, 술쳐먹고 추태를 보인 학생들을 우연히 만나 도망치게 되고, 고덕동 전 여친의 문자를 세번씩이나 씹게 되면서도 그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성준으로 하여금 우연의 절정을 경험하게 하면서, 그 끝에 이르러 결국 북촌의 집 한 모퉁이에 갖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초라한 신세를 경험하게 한다. 한 때는 살아 숨쉬었지만 지금은 액자처럼 되어버린 북촌의 모습처럼, 성준도 그렇게 예전의 화려했던 모습은 잊혀진 채 누군가의 사진속에서나 기억되는 존재로 희미해져 간다.
작고 큰 인생의 굴곡을 지나온 사람들만이 그 끄트머리에 편히 앉아 인생을 한 두마디로 정리해 낼 수 있는 것 처럼, "친한 선배 만나서 아는 사람들하고 술먹고 잡담하는 얘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80분짜리 짧은 영화로서 홍상수 감독은 그의 인생관을 또렷하게 새겨놓았다.
최고의 고수는 긴 말이 필요없다. "죄가 없다면 돌을 던져라" 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던 예수처럼 홍상수 감독은 앉은 자리에서 툭 던지듯 말한다. "삶의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시작은 나로부터" 라고.
Filmania CROPPER, 원성백 http://blog.naver.com/cropper_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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