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한반도의 무덥던 6월, 북한의 남침에서 촉발된 전쟁은 일진일퇴하다가, 그 해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국제 대리전의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점점 격렬해지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일진일퇴의 소모전으로 교착(膠着)상태에 빠지게 된다.
단시일내에 종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휴전회담조차 남북의 경계 설정의 이견으로 성과없이 2년이 지나 버렸다.
자유진영 연합국의 수장 미국과 공산측인 북한, 중공군의 대표가 지도를 펼쳐 놓고 마주앉아 지도상의 1cm를 두고 끊임없이 땅따먹기 놀이를 동안, 최전선은 휴전협정 조인(調印)전까지 단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피의 살육전을 벌인다.
영화의 주 무대인 애록(Aero-K)고지도 그 중 하나인데, 아마도 Korea의 철자를 역순으로 배열하여 가상의 ‘애록’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제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휴전 협상에 동참하던 남한 방첩대 장교 강은표(신하균 분)는 동부전선에 북한 괴뢰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상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진상파악을 위해 ‘악어 중대’로 급파된다.
그곳에서 은표는 예전의 1.4후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대학동창 김수혁(고 수 분)를 만나게 되지만 그가 알던 수혁은 이미 아니었다.
2년전 은표가 소대장 시절, 사이다병 밑창같은 두꺼운 안경을 끼고, 나약하기 그지없던 그 이등병 친구는, 전쟁의 참화(慘禍)속에서 강인하고 냉혈(冷血)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한 전사(戰士)가, 게다가 전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의 씨니컬(cynical)한 장교(중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진전없이 지루한 휴전 회담기간동안, 애록고지는 처절한 전투중에 주인이 수 백 번 이상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김수혁과 그 부하들은 자연스럽게 북한군과 암묵적으로 약속된 장소의 나무상자를 공유하며 편지와 술 등을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표는 그곳에서 알게 된다.
사실 내통을 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남한출신의 북한군이 남쪽 고향의 가족에게 띄우는 편지를 전달 해 준 것 뿐이었다는 점도 함께 알게 된다.
북한군 역시 우리와 같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인간이기에 편지를 보낼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악어 중대’엔 또 다른 충격적 비밀이 하나 있었다.
낙동강 전투에서 패퇴(敗退)하여 적군에게 포위된 포항앞바다에서, 비좁은 수륙 양용선에 먼저 승선한 국군이 나중에 배에 오르는 아군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탈출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이 현재 악어중대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그들 자신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학하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막중한 바위에 스스로 매여, 전쟁이라는 독수리의 부리에 간장을 쪼이며, 정신분열자가 되거나 몰핀에 중독된 전쟁광으로 변해갔다.
전쟁이라는 특별하고 처참한 상황이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양산(量産)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밀고 밀리는 고지전, 나발소리와 함께 조명탄에 비쳐 차츰 들어나는, 빗발치는 총알보다 많은, 어마어마한 병력의 중공군의 실체는 차라리 몸서리쳐지는 공포 자체였다.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 되고, 악어중대도 애록고지에서 대치하던 북한군도 모두 환호를 지르지만 그것도 잠시,
협정은 12시간 이후에 발효된다는 소식에 고지를 탈환하고 고수(固守)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다시 피를 뿌려야 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피할 수 없는 전투는, 희뿌연 화약연기속에서 남과 북이 부르는 애절한 ‘전선야곡’ 속에 재개된다.
"미군은 우리를 악어부대라고 한다. 악어는 알을 50개 낳는데, 그 중 절반이 다른 동물에게 도둑맞고, 또 알에서 나온 새끼악어들은 또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히고, 결국 마지막에 남은 악어 한 두 마리가 늪 전체를 지배한다. 우리는 살아 남았다. 우리가 그 악어다. 꼭 살아서 보자."
나이 어린 까까머리 중대장의 마지막 절규였다.
<소감>
결국 승자없는 전쟁에 휴전이 선언되고 고지엔 전쟁의 목적조차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린 울면서 웃는 두 사람이 남게된다.
휴전의 땅,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반도는 바로 이런 곳이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전쟁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서 들국화처럼 피어나는 전우애,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비열해지는 인간의 이기주의, 종국엔 서로에게 아무것도 남는 것 없는 무의미한 전쟁의 헛되고 허무함, 전체에 거부할 수 없는 나약한 일개인의 무력함이 영화에 잘 묻어있다.
절반쯤 죽어 줘야 내가 탈출할 수 있고, 성식이(극중 이등병)가 죽어줘야 스타니퍼 ‘2초’(김옥빈 분)를 잡아서 앞으로의 죽음을 피할 수 있고, 판단력 흐린 상관이 죽어줘야 우리 부대가 무사할 수 있고, 눈 앞의 저 적이 죽어줘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전쟁이란 지옥에 적응한 인간의 모습이며, 어머니의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지옥에 가야하지만 전장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 가지 못하는 비자발적 살육자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전쟁을 두 번 다시 겪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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