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폭력인 80년대를 통과한 아픈 성장기... ★★★☆
집에서 키우던 개 밍키를 아버지(안내상)가 동네사람들과 잡아먹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개고기가 담긴 솥에 토를 하는 것으로 반항을 표현했던 진우(연준석)는 유년기를 넘어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가슴에 담고 살아 나간다. 노름판을 기웃거리다 많은 빚을 지고 한동안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민정당원도 권력이라고 으스대며 언젠간 구청장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있는 아버지, 돈 한 푼 벌어오지 않으면서 권위를 내세우려 하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로 인해 엄마(김소희)는 술집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고, 진우는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누나(류현경)는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내비치지만 끝내 아버지를 완전히 떠나보내지는 못한다.
<굿바이 보이>는 1988년 전두환 군사정권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키워드는 ‘폭력’. 국가의 폭력으로 여대생이 쓰러지고, 직장에선 사장의 폭력에 청소년들이 멍들며, 동네 골목길에서의 일상도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일상화된 폭력을 제재하거나 막을 제도적 장치는 전혀 가동되지 않으며, 그건 단지 개인적인 용기에 의해서만이 가능할 뿐이다.
흥미로운 건, 대게 이런 시대극에서 폭력을 얘기할 때, 주로 그 상징으로 묘사되는 아버지의 폭력이 <굿바이 보이>에선 거세되어 있다는 점이다. 방첩대 출신으로 민정당원인 아버지는 폭력적 가부장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그저 무능한 가장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찌 보면 일종의 로맨티스트이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에 성공했을 것이고, 방첩대 근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보다 자유주의자에 가깝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였다면 한량. 영화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거세했다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않겠다는 의도의 반영이리라. 아버지가 죽더라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던 누나의 결심이 그저 빈말처럼 들렸던 이유도 최소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극악무도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며, 화해가 가능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그리고는 있지만, 사실 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유사 아버지의 역할은 친구인 창근(김동영)이 하고 있다. 이건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 가능한데, 우선 첫째는 청소년기의 가장 큰 특징이 가족 중심에서 친구들과 좀 더 넓은 관계로 나아간다는 점, 대게 친구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일반적 상황의 반영이라는 것이고, 둘째, 이 영화에서 창근은 유일하게 폭력을 제압하고 폭력에 무릎 꿇지 않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우가 소년을 지나 남자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보다는 유사 아버지, 창근의 사고가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우는 신문보급소장의 폭력에서 빠져나올 때 창근과 동일한 대사를 날린다)
근자에 등장한 근과거를 다룬 영화들이 대체로 과거를 따뜻하고 정겹게 그리는 데 반해(대표적으로 <써니>) <굿바이 소년>은 그 시대를 폭력이 지배한,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가 충분히 가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정권을 잡기 위해 수백 명의 시민을 학살했으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고문과 폭압적 탄압을 자행했던 정권이 배경인 사회에서 폭력을 거세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다분히 신파로 빠질 수 있는 장면에서 그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진우의 내레이션을 개입시켜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도 권위나 폭력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으로서 유의미해 보인다.
반면, 전반적으로 이야기 흐름은 좀 산만해 보인다. 이는 진우의 성장이라는 과정에 너무 많은 것들을 개입시킴으로써 발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깐 80년대 말이라는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그 시대에 발생한 대부분의 시대적 아픔이 진우 주위를 떠돈다는 것이다. 그런 아픔이 그 시대에 발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온전히 한 명의 개인 또는 가정에서 모두 발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 류현경의 페이스는 분위기에 따라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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