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영화... ★☆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원작 소설을 언제 읽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원제는 <Norwegian Wood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오히려 더 적합한 듯 느껴지는 소설. 와타나베,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 뭔가를 상실해 가는 시대. 20대에 내가 느꼈던 상실감이 이 소설을 통해 그대로 외화된다고 느꼈을 정도로 공감해 마지않았던 소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읽는다면 그 때의 가슴 저린 느낌이 다시 되살아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유치하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난 이미 20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련하게 남아있는 건, 혼란한 청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슴 아픈 로맨스였고, 그 로맨스가 더 돋보였던 건 시대의 묘사와 주인공들이 겪는 아픔이 바로 그 시대의 아픔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영화화를 거부하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감독도 아닌 트란 안 홍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했을까? 일본이라는 시대 배경을 마음으로 공감하지 않는 감독이 이 작품을 연출할 수 있을까? 혹시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와 베트남 또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오코 역을 맡은 배우가 키쿠치 린코란다.
좀 불안했던 건 이 때부터였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고 이미지를 떠올려 봐도 키쿠치 린코와 나오코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시사회 이후 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다. 볼까 말까 한 동안 고민하다가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이 피천득의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때인가 중학교 때인가 국어책에 수록되어 있던 그 짧은 수필.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거란 그 소설. 그렇다. 영화 <상실의 시대>는 소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사람에겐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영화인 것이다.
시대배경이 거세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가? 시대상이 거세된 영화 <상실의 시대>는 그저 하이틴 로맨스이며, 그것도 에피소드를 집어넣느라 허우적대다 끝나 버리고 만다. 그나마 미도리와 레이코의 사연은 거의 대부분 날아가 버려 이들의 관계에 공감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들은 대체 왜 사랑에 빠지며, 고통과 혼란 속에서 헤매는가? 영화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 소설에 비해 영화 속 미도리는 좀 얌전하게 그려진 듯 하고, 반대로 나오코는 요란하게 그려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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