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겨울을 견뎌내며 성장하는 혜화의 잔혹사... ★★★★
※ 영화의 중요한 설정이나 결말이 담겨져 있습니다.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이면서까지 이루어지는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재개발, 철거촌. 언제나처럼 그곳에서 유기견들을 돌보는 혜화(유다인) 앞에 5년 만에 한수(유연석)가 나타난다. 혜화는 한수를 밀어내지만, 그럴수록 한수는 ‘아이가 살아 있다’며 혜화 근처에서 서성댄다. 한수의 말에 혜화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 <혜화, 동>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혜화동을 주무대로 벌어지는 영화라는 생각과 함께 동물원의 <혜화동>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어릴 적 함께 꿈꾸던 부푼 세상을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언제가 돌아오는 날 활짝 웃으며 만나자하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물론, <혜화, 동>은 종로구 혜화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도 아니고 딱히 동물원의 노래를 모티브로 한 영화도 아니다.(가사의 해석을 끼워 맞출 수는 있어도) <혜화, 동>이라는 제목은 처음엔 겨울(冬)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의 발언) 영화를 보건대 다분히 중의적 의미로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아이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보면 童으로, 혜화의 마음이 흔들리고 변한다는 점에서 보면 動으로, 누군가와 같이 길을 걸어가려 한다는 점에서 보면 同으로 봐도 무방하다.
전반적인 진행이나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현재와 과거를 계속 오르내리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독특한 형식에 의한 것이거나 또는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혜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혜화는 네일 아티스트가 꿈인 밝은 미소를 얼굴 한 가득 담고 있는 소녀였다. 반면 현재의 혜화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텅빈 얼굴로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유기견을 돌보고 있다. 고작 5년이라는 사이에 혜화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영화가 얘기하는 것은 바로 이 5년의 변화다. 혜화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 그리고 5년 전과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비추며, 이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단순하지만 매우 잘 짜여진 가구를 연상하게 한다. 미혼모의 처지를 유기견의 처지에 빗대어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또는 반대로) 5년 전과는 판이하게 변해버린 남녀 주인공의 변화도 흥미롭다.
혜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분명 혜화에 대한 너무나도 가혹한 5년의 일기가 될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건 혜화가 자신이 어릴 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언제 안 것일까라는 의문, 5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치매 걸린 엄마의 넋두리로 알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여고생 임신에 대한 가족의 반응도 흥미롭다. 일반적인 반응과는 조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이미 한 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의 모습인가? 아니면 이 가족 구성원들은 원래 좀처럼 흥분을 하지 않는 것인가?
정리해보면, 혜화는 5년 전 한수와의 사이에 임신을 했지만 꿈이 있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한수는 떠났고, 아이는 죽었으며, 네일 아티스트의 꿈은 깨졌다. 그리고 엄마 개(혜수)와 강아지들은 멀리 보내졌다. 시기적으로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엄마는 치매에 걸렸고, 재개발로 살던 집에서 쫓겨났으며, 자신이 어릴 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일종의 속죄로 동물병원에서 근무하며 유기견을 찾아 돌보며 살고 있다. 동물병원 의사 정헌(박혁권)과 아이, 그리고 혜화는 일종의 유사가족으로 손색이 없는 외형을 갖추고 있다. 아이는 혜화를 엄마처럼 따르고 혜화도 아이를 위해 모성(가슴)을 내어준다. 그러나 자신이 유사 엄마라는 혜화의 착각(?)은 의사의 결혼 소식으로 산산조각난다.
이런 점에서 의사가 결혼소식을 알리는 순간이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유사 가족의 꿈의 깨어지는 순간, 유사 엄마로서의 자격이 박탈되는 순간, 5년 동안의 계속된 타인으로부터의 배제가 정점을 이루는 순간이 바로 이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결코 타인으로부터 선택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혜화의 얼굴 가득 드리워지는 모습은 그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 지점까지 혜화와 혜화를 둘러싼 환경을 보여주며 매우 다채로운 빛을 띠지만, 이후 혜화의 환경적 인물들은 영화에서 퇴장하며 혜화와 한수의 관계에 집중한다. 이것이 스토리에 집중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혜화의 삶에서 이들의 존재감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들의 퇴장으로 영화가 다채로움을 잃고 단조로워진 건 사실이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혜화는 유기견을 돌보고, 한수는 아이에 집착한다. 이건 일종의 형벌이다. 한수는 결코 아이가 죽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혜화도 한수의 집착에 흔들린다. 아마 의사의 결혼소식이 아니었더라면 이 흔들림은 더 유예되었겠지만 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실을 마주대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는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 룸미러로 보이는 한수의 걸음걸이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고 이를 바라보는 혜화도 고통스럽다. 타인으로부터 배제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혜화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을 것인가?
※ 이 영화에서 가장 빛이 나는 건 유다인, 유연석이라는 두 배우의 표정이다. 아니 표정이라기보다는 얼굴이다. 청춘의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치며 성장하는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 두 배우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 5년 동안 온갖 고통스런 일을 경험한 혜화가 보여주는 온도는 미지근하다. 누군가 혜화가 한번쯤은 발화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좋았지 않느냐란 얘기를 했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현실에 미치거나 돌아버리지 않으려면 폭발할 때도 필요하다.
※ 결론 지점에 와서 영화는 계속 주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몰라서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솔직히 결론이 딱히 해피엔딩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동일한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는 한수가 혜화에겐 고통의 순간을 소환할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혜화에겐 혜화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잊게 해 줄, 자신의 상처와는 무관한 존재가 필요한 건 아닐까.
※ 가장 빛이 나는 순간은, 혜화가 자살을 생각할 때, 강아지의 치유와 혜화의 눈물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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