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의지와는 정반대인 세상에서의 몸부림, 그 속에 빚어진 예기치 않은 범죄와 희생은 한 인간을 바닥으로만 밀어 내고 말았다. 그 속의 죄책감,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엔 너무 큰 희생. 그것들이 진행되는 곳은 세계적인 도시인 Boston의 뒷골목인 Charlestown이다. 못 사는 동네, Charlestown, 한 때는 그곳에 따뜻한 동료애도 있었고 Community 의식도 있었다. 비록 밑바닥 깡패와 같은 인간관계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래도 멋있어 보였다.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그런 관계. 그것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침탈에 보호받을 수 있는 집단의식. 내용이야 어떻든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것에 의지할 수 밖에도 없었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엔 그것마저도 사라진 그렇고 그런 도시가 된 Charlestown. 그곳은 가난이 지배하고, 과거의 악연을 재생산하는 사회의 Loser들이 모인 동네로 전락했다. 그런 도시 출신들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었나 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범죄자로까지 떨어진 4명의 젊은이들은 건강한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었다. 자신의 불행한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들은 고용된 전문은행털이범들이었다. 고용됐지만 결코 사퇴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그들이 턴 은행에서 그들은 은행직원들을 협박하지만 그들을 부리는 범죄의 우두머리는 은행털이를 그만 두려는 은행 강도단의 리더 ‘더그(벤 애플렉)’에게 협박으로 화답한다. 건강한 미래를 포기하라는 위협은 그의 미래의 행복도 앗아갈 기세였다. 결국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된 상태에서, 더그는 자신의 위기뿐만 아니라 그가 아끼는 인물들의 위기를 피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피해자였던 여자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의 이력과 환경 때문에 오래 갈 수 없었다. 결국 사랑도 그의 인생엔 사치였는지 모른다. 자신이 그녀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폭로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처한 환경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강도로서의 그의 상품가치를 위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악용할 의지가 있는 그의 의뢰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뻔한 구도를 가졌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 더그의 죄의식은 무척 가슴이 아픈 내용이었다. 현재를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Charlestown과의 지독한 악연은 그가 지내는 시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부모의 불행한 과거 속에서 자란 그는 결국 아버지의 과거의 악연으로 인해 삶의 불행한 질곡을 다시 잇게 됐고, 벗어나려고 하지만 협박만이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할 수 없는 그의 Charlestown에서의 삶은 과거야 어찌 됐든 불행, 그 자체다. 그의 은행강도 혐의로 그를 계속 쫓아오고 있는 FBI 형사는 Charlestown의 변형된 악연일 뿐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알면서도 저지른 은행강도에 대해 살아 있든, 죽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란 고민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더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은 이미 불행했었고 그런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다. 친구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동료, 젬(제레미 레너)의 요구는 더 이상 도망갈 출구가 없는 가련한 Charlestown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는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도 없었으며, 강도하다 경찰에 걸리면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감방에 가고 싶지 않은, 오늘만을 사는 젊은이다. 그에게 죄의식이 있든 없든 그것이 인생을 사는데 기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더그와 같은 시공간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 엮인 더그의 미래 역시 어느 순간 젬과 닮아 갔으며,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젬과 같은 인생을 사는 위기에 직면한다. 최소한의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조차 거세된 채, 이번 은행털이가 성공하면 다음 은행털이를 계획하는 범죄인일 뿐이다. 타인을 희생해야만 자신의 현실이 유지되는 모순 섞인 비극은 더그의 죄의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런 인생을 피하기 위해선 젬처럼 인성이 마비되던가, 아니면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위험한 것이지만 그래도 오직 두 가지만의 선택사항으로 몰리는 더그의 선택은,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의 미래를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더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영화는 무거운 폭력 속에서도 서정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서정성이 더그의 불행을 제거해주진 않는다. 그 속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 평생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야 할 운명을 순순히 받아 들인다. Charlestown을 저주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부모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는 비극의 대명사인 오이디프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니 방법은 달랐을 뿐이리라. 그의 마지막 선행은 오이디프스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포기했음은 분명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인생에 대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에 보인 인간미는 중요해 보인다. 즉, 묵직한 주제의식에서도 인간미는 분명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 결코 피하지 않으려 한 주인공 더그의 모습은 묘한 인상을 주었다. 범죄자인 그를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됐고 그를 위한 변명을 위주로 영화는 진행됐지만 더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결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어느 호숫가에서 죽든 살든,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악연 깃든 숙명 속에서 살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를 인생의 쓴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시작이 무엇이든 그런 운명 앞에 나약해지고 무너져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다. 그리고 살아가는 배경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도록 하는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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