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守成), 즉 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전쟁서사극이 자주 선택하는 상황이다. 가까운 기억을 들추면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무사> <황산벌> <트로이>가 공성과 수성의 구도로 웅장한 죽음의 무도를 펼쳤다. <묵공>의 특수성은, ‘수성’의 모티브가 줄거리인 동시에 영화의 테마이자 철학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다.
모리 히데키의 원작 만화를 한국, 중국, 일본, 홍콩, 아시아 4개국 자본과 인력이 스크린에 재연한 <묵공>은 중국 대륙에 7웅이 할거한 기원전 370년 전국시대다. 강성한 조(趙)나라가 인접한 연(燕)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하자 공격 길목에 자리잡은 인구 4천명의 초라한 양성은 불면 꺼질 듯한 운명에 처한다. 저항하면 도륙당할 것이요, 항복하면 노예가 될 터. 양성 군주 양계와 백성에게 유일한 의망이 있다면, 침략당한 약자를 무조건 지원하는 집단 묵가(墨家)의 구원이다. 겸애를 숭상한 묵자는, 개인이 개인에게 범하면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일은 국가간에도 행해지면 안 된다고 굳게 믿은 사상가였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들은 무공과 지략으로 침략받은 약자를 도와 살육을 끝내는 ‘전투적 평화주의’- 묵공- 를 실천했다. 오직 방어만을 위한 폭력. <스타워즈>의 제다이 기사단이 그들의 검에 부여한 규율과 비슷하다. 양성의 교활한 군주 양계가 지적하듯 여기에는 쓸쓸한 역설이 있다. “수성은 전쟁 중에는 유용하지만, 평화 시에는 쓸모없는 기술이다.”
양성에 당도한 묵가의 원군은 겨우 한 사람. 왕에게 ‘혁리’라 이름을 고한 사내(유덕화)는 피로에 절어 남루한 행색이나, 결연하게 움직인다. 묵가 지도부의 결정에 불복해 양성에 온 혁리는 항복을 결심한 왕을 간신히 설득해 병권을 쥔다. 그리고 대군의 1차 공격을 물리쳐 자존심 강한 왕자 양적(최시원)을 비롯한 지배층을 침묵게 한다. “백성없이 왕도 없다”며 왕궁 벽을 허물어 성곽을 튼튼히 하는 혁리의 태도에 “여기서 뜯기나 저기서 뜯기나 마찬가지”라고 자포자기했던 민심은 돌아선다. 궁수부대장 자단(오기륭)과 양적 왕자는 충심과 존경을, 기병대장 일열(판빙빙)은 한 걸음 더 떼어 연심을 혁리에게 품는다. 혁리를 알아보는 자는 성 밖에도 있으니 조나라군을 이끄는 고결한 무인 항엄중(안성기) 장군이다. 장기판을 놓고 혁리와 한나절을 겨룬 항엄중은 혁리와 교감하는 동시에 양성이 자신의 생사를 가를 전장임을 깨닫는다. 항엄중이 구사하는 공성의 세 가지 전술- 성벽 오르기, 성문 부수기, 땅굴파기- 과 혁리의 교묘한 받아치기로 <묵공>의 내러티브는 한발 한발 전진한다.
안성기가 더빙없이 직접 중국어로 연기한 항엄중은 승부 앞에 경건한 장수이며, 불완전한 세계 안에서 의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사내다. 장즈량 감독은 원작 만화보다 선악의 편 가르기에 신중을 기했고 인물마다 뉘앙스를 더했다. <묵공>의 인물은 모두 처한 위치에서 일관성을 보이며 그중 다수는 존중받을 만하기까지 하다. 야비한 자도 끝내 한 가지 긍지는 간직한다. 유덕화의 혁리는 예수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이다. 광야를 건너온 그는 그를 탐탁잖아 하는 자들에게 베풀지만 뒷날 구원받은 자들의 배반으로 수난받는다. 또한 혁리를 따르는 자들은 팔다리 또는 목소리를 잃는 박해를 받는다. 봉사의 대가를 받는 일을 금하는 묵가의 계율에 따라 새 신발을 거절하는 혁리에게 일열은 조용히 지적한다. “선물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지 않을까요?” 혁리는 <수퍼맨 리턴즈>의 슈퍼맨 정도나 필적할 만한 근래 보기 드문 ‘반듯한’ 영웅이다. 그는 싸우는 자보다 생각하는 자에 가깝다. 두 시간이 넘는 전쟁영화 속에서 쉬지 않고 분투하지만 그가 손에 피를 묻히는 광경은 드물다. 중국 농민의 고통을 다룬 <케이지맨>, 두 여인의 사랑을 그린 <자소>(유가령, 양채니 주연)를 연출한 중견 장즈량 감독은, 10년의 기획이 낳은 160억원 예산의 프로젝트 <묵공>에서도 스펙터클의 전시보다 갈등을 묘사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정성을 들였다. <묵공>의 혐오는 전쟁의 살육 자체가 아니라, 적이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찾는 인간 정치 공동체의 비애스러운 결함을 향한다.
<묵공>은 더 다듬어질 여지가 많은 영화다. 일부 중국어 대사 더빙은 입 모양과 어긋나고, 2시간20분의 최종본을 내기까지 고심한 듯한 편집은 전세와 관련된 몇 가지 고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완급의 조절이 미흡해 작은 클라이맥스들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야간 정탐 장면이 느닷없이 대낮으로 넘어가는 ‘티’도 있다. 두 주인공 사이의 긴장과 유대감은, 항엄중의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축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합당한 중량감을 얻었을 것이다.
<묵공>의 깃발은 장이모의 <영웅>이 섰던 지점 반대편 봉우리에서 휘날린다. <영웅>은 천하의 환란은 선택된 강자인 진나라와 진왕 정(시황제)만이 종식시킬 수 있으며 독재 치하의 안정이 천하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명제의 정당성을, 날고 기는 무예 고수들의 판단에서 구했다. 반면 그것이 누가 됐건 침략 행위를 부정하는 혁리의 신념은 좀더 근대적이다. 전쟁서사극 <묵공>의 전투에는 고수들의 화려한 일대일 승부나 입이 떡 벌어지는 와이어 액션과 CG가 보이지 않는다. <영웅>의 대군이 오페라의 코러스나 무용단처럼 움직이며 무대장치를 만들었다면 <묵공>의 볼거리는 각각의 부대들이 진을 형성하고 이동하는 모습을 측면에서 조망하는 숏과 상처 입은 몸을 끌고 퇴각하며 무너뜨리지 못한 성벽을 뒤돌아보는 조군 말단 병사들의 피로에 찌든 얼굴에 있다.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도 살아남는 수성(守成)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인지 <묵공>은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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