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록에 따르면 박경원은 168cm의 장신이었고, ‘조센진’이라는 말에 일본 병사의 뺨을 후려치는 여자였다. 그는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비행기가 못 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드물게 여류비행사로 활동한 박경원의 삶을 그린 <청연>에서는 이런 장면을 볼 수 없다. 영화의 최종 각색자인 윤종찬 감독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여류비행사의 이야기를 익숙한 영웅담의 구도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독한 비행사 훈련의 몇 장면이 지나면 박경원은 처녀비행을 하고, 다시 학교간 대회에 출전하는 실력있는 비행사로 성장해 있다. 주독야경하며 비싼 수업비를 대느라 1년이면 수료할 비행사 이론과정을 4년 만에 마쳐야 했던 시절도, 단독비행시간 200시간의 기록을 수립했다는 것도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정보다.
박경원(장진영)의 삶은 여류비행사로 성장하는 과정이 과감히 압축된 뒤에야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하늘이 가장 좋다”는 그가 다 얻었다고 생각한 하늘을 잃을 처지에 놓인 것이 곧 <청연>의 시작이다. <청연>은 가상의 인물이자 연인인 한지혁(김주혁)과의 관계를 통해 시대를 앞서갈 만했던 여자의 독립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정치적 사건의 누명을 통해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기보다 개인적인 꿈에 솔직한 인물을 그린다. 이것은 <청연>의 성취다. 조선을 점령하러 온 일본 군대를 보며 닌자에 관한 상상을 하는 어린 박경원을 그린 첫 장면부터 영화는 민족주의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민족주의의 강박관념을 배제한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낭만적 로맨스다. 박경원과 한지혁의 사랑은 시대의 아픔과 무관하게 전개되다가 일순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다. 개인과 시대의 관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소름>에서 개인과 운명을 바라봤던 그것과 통한다. 다만 <청연>에는 동료 비행사의 죽음이나 삼각관계 등의 설정 등 감상적인 장치가 훨씬 많다. 그것은 때로 효과적이지만 때로 지나치다. 다소 과장된 연기 스타일과 관습적인 음악 등이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만 박경원의 친일 논란 같은 것은 걱정할 것 없다. 영화 안에서 다 설명이 되는 부분이니 미리 반민족적 영화라고 규정하는 어리석은 일은 안 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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