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되면 가족들에게 50억원 상당의 유산을 나눠주고, 통일이 안 된 채 사망하면 전액을 통일부에 기증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장을 보고 흔들리지 않을 자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아버지의 여생이 3개월뿐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통일 자작극’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철조망을 감고 DMZ에서 1인시위라도 하려 하지 않을까. <간큰가족>은 이렇듯 비정하고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남한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빚독촉에 시달리는 명석(감우성)과 가족들이 아버지 중엽(신구)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사서 하는 모습은 사악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애처로워 보인다. 늘 북에 두고 온 딸자식 이름만을 되뇌던 중엽이 이산가족을 상봉한다는 설렘에 건강을 되찾는 기적을 행하지만 않았던들 이 가족의 소동극은 900만원이라는 ‘저예산’만 지불한 채 끝낼 수 있었을 터. 이제 “우리 언제 피양에 가네?”라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선 TV뉴스 조작이나 한밤중의 휠체어 레이스, 가짜 탁구대회 정도를 넘어 마을 전체를 속이는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처절할 정도의 ‘통일 빙자 사기’에 나선 주인공들 각자의 마음속은 도통 알 수가 없다. 특히 불어가는 빚이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시작한 명석이 아버지에게 도리어 “북에 있는 자식만 자식이냐”고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거나 미수금을 받으려다 이들에게 코가 꿴 박 상무(성지루)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에 가면 어리둥절할 정도다. 특별한 연결고리도 없이 태도가 바뀐 캐릭터들이 장면의 필요에 의해 주어진 몫을 하는 동안, 우리네 가족의 구차스런 삶은 통일에 대한 갈망 또는 이산가족의 절절함이란 커튼 뒤로 황급히 사라진다. 슬랩스틱과 오버액션을 거듭하고 유쾌함과 고루함을 뒤얽어놓았어도 공감의 끈을 놓지 않았던 영화가 느슨하게 느껴지게 되는 지점도 캐릭터들이 화석처럼 변하는 대목과 그리 멀지 않다.
구성을 흐트리면서까지 뭉클한 감상을 밀어붙이는 <간큰가족>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밉지 않다. 그건 명규의 대사처럼 “시나리오상 허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생기는 병’에 걸린 한 사람의 소망을 이뤄주려는, 비현실적이라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거나, 한 집 안에서만 이룩됐을지언정 통일이란 단어가 주는 감흥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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