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프랑스 최고의 영화로 불렸던 역사 풍자극 <조롱> 말고도 10편이 훌쩍 넘는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지만, 우리에게 호명되는 파트리스 르콩트는 연애술사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1990)과 <걸 온 더 브릿지>(1999) 두편이 국내 개봉했을 뿐이기도 하지만, 뒤늦게 찾아온 <친밀한 타인들>(2004)까지 세편을 자의적으로 묶으면 깔끔한 ‘파트리스 연애 3부작’이 완성된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완전성에 대해 충격적인 카운터펀치를 날렸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나 사랑은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시작해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성사된다는 연애 로드무비 <걸 온 더 브릿지>를 거쳐 <친밀한 타인들>에서 연애는 결국 한편의 스릴러임을 웅변한다.
파리의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안나(상드린 보네르)의 발걸음을 추적하는 카메라의 긴장감은 처음부터 히치콕적이다.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를 궁금히 여기라는 명령투다. 남편 대신 신부를 사랑하게 된 아름다운 여인의 고통스런 절규가 흘러나오는 TV를 괴기스럽게 응시하던 중년 여성이 안나가 처음 만나는 인물이다. 안나는 그녀에게 프로이트를 고스란히 닮은 정신분석의 모니엘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침묵에 잠긴 복도 끝을 지나 노크한 문을 열어준 이는 유사 프로이트가 아니라 세무사 윌리엄(파브리스 루치니)이다. 재무 분석 서적을 멋대로 정신분석 서적으로 착각한 안나가 윌리엄에게 남편과의 문제 때문에 괴롭다는 고백을 툭 펼친다. 윌리엄의 눈빛이 안나의 미모에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녀는 닥터 모니엘이 윌리엄의 방 반대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새도 없이 이야기를 멋대로 끊어버리고 가버린다. 또 불쑥 나타난 안나는 자기 고백만 짧게 던지고 훌쩍 가버린다. 오해가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시 찾아온 안나는 윌리엄의 의사 사칭에 분노를 터뜨리고 사라진다. 미스터리는 이제부터다. 윌리엄의 정체를 알고도 안나는 그를 찾아와 남편과의 ‘불화’에 대한 토로를 이어간다. 6개월 전에 남편이 죽는 걸 봤다거나 자신이 남편을 차로 치어 불구가 됐다거나 아빠가 엄마의 차에 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간격을 두고 딸려나온다. 안나는 자신이 외간 남자와 섹스하길 원한다는 남편의 발언까지 꺼내는데, 윌리엄은 안나의 정체를 종잡을 수 없다. 남편과의 불화 혹은 성불구가 진짜인지, 아니 남편이 진짜 존재하기나 하는지, 자신의 방으로 계속 찾아드는 그녀의 진짜 속셈은 무엇인지. 이즈음 복선처럼 끼어들던 TV 속 신파는 야릇하게 돌변한다. 남편을 버리고 용감히 신부의 품에 안겼던 여인은 신부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남편의 품 안으로 속물스럽게 돌아간다. 윌리엄이 안나 남편의 공격적인 방문을 받는 것도 그즈음이다.
연애가 스릴러일 수밖에 없는 운명은 자의적인 파트리스 연애 3부작 내부에 일찌감치 똬리를 틀어왔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은 시골 소년의 판타지 성장담처럼 흘러가지만 비밀스러운 점프컷이 많은 미스터리를 남긴다. 가슴 풍만한 미용사를 사랑했던 소년 앙트완이 어느새 중년이 됐고 그 사이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중년의 앙트완이 두 번째로 사랑하게 된 미용사 마틸다는 왜 그의 청혼을 덥석 받아들였는지, 마틸다는 앙트완과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살한다지만 홀로 남겨진 앙트완은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하고 중요한 건 앙트완과 마틸다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의 완성도를 향유하고 마무리하는 태도이지만, 그런 완벽에 가까운 연인이 수십년 만에 불쑥 나타났다 예고없이 사라진다는 운명은 스릴러적이다. <걸 온 더 브릿지>에서 칼잡이 가보와 미래없는 아델은 죽음의 문턱에서 만나 서로를 구원하지만 아델은 가보를 곁에 두고도 늘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다. 정체 모를 가보는 역시 정체 모를 아델의 예측불허 행보를 그저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상대방의 역사나 정체도, 달콤한 밀어의 미래도 알지 못하며 선택하는 순간들 역시 스릴러적이다.
<친밀한 타인들>은 그 불안하고 미스터리한 순간들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정교하게 쪼개놓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윌리엄이 마침내 안나의 뒤를 미행해 파리 교외까지 나가 집을 알아내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질투하는 안나의 남편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들의 정사를 훔쳐보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지만 안나와 남편의 진짜 관계가 어떤지 여전히 미궁이다. 다른 한편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윌리엄의 미스터리는 안나 못지않다. 중년의 윌리엄은 아파트 겸 사무실을 겸하는 공간에 주거하고 있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비서는 심술기가 넘실대는 할머니이고 사무실 한쪽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가득하다. 윌리엄이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왔고, 아버지 역시 세무사였으며, 비서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는 사실이 느리게 하나씩 밝혀진다. 윌리엄은 이상한 우연으로 마주친 안나를 알게 되기 전까지 이 모든 걸 알지(의식하지) 못했다. 고급스럽고 아늑한 공간이 실은 갑갑한 새장 같은 우리라는 것이나 자기보다 먼저 새 애인을 사귀어 질투했던 옛 애인이 사실은 자기 때문에 생긴 상실감으로 6개월간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는 것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는데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안다는 건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될까. 안나가 스스로에 대해 분명히 아는 건 방향 감각과 시간 감각이 보통 사람에 비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안나는 그것 때문에 윌리엄을 정신분석의로 오인해 만나게 됐듯 지금의 남편을 어떤 오인으로 만나게 됐고 그래서 자신이 지금 불행한 것인지 모른다고 깨달은 듯싶다. 알고 나면 그나마 처신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안나는 남편과의 이혼을, 윌리엄은 이사를 결심한다. 안나가 만나려고 했던 유사 프로이트가 윌리엄에게 해주는 조언대로다. “(정신과)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환자가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뿐이다”, “(정신과) 상담의 목표는 환자가 결단을 내리게 하는 데 있다”.
<친밀한 타인들>이 정신분석의 교훈을 남기려는 사이코드라마는 아니다. 누구나 갖고 있을 약간의 결점을 지닌 남녀가 스스로를 자각하고 새로운 사랑을 구현하는 로맨스다. 다만 그 로맨스의 스릴러적 속성을 스타일, 캐릭터, 테마로 가꿔가는 솜씨가 이른바 예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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