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청문회,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잔혹(cruelty)이 현실(reality)이 돼버린 사회
글=임재훈
<악마를 보았다>는 잔혹하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영화 속에서 장경철(최민식)이 제가 살해한 여성들의 시신을 '다루는' 모습은 철저히 영화 밖, 즉 현실에 입각해 있다.(유영철, 강호순 등을 떠올려보라.)
약혼녀(오산하)를 잃은 국정원 경호요원 김수현(이병헌)의 복수 플롯에 카타르시스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잡았다 풀어주고"를 반복하는 수현의 복수는 경철의 살인 행각과 병치된 잔혹함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역시 영화 밖과 닮았다.
얼마 전 끝난 인사청문회 얘기를 해보려 한다. 생중계 화면은 후보자들의 자못 엄숙한 얼굴과, 그들을 추궁하는 야당 의원들의 바짝 벼려진 얼굴을 한 프레임에 담아 보여줬다. 공격하는 자가 주로 말하고, 수비하는 자는 주로 침묵한다.(혹은 거짓말을 하거나.) 이번 청문회는 말은 말 속에, 침묵은 침묵 속에 있을 때만 각자의 진가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말과 침묵이 공존하니 영 불편해서 TV 보기가 거북했던 것이다. 정치적 언어와 정치적 침묵의 공존이라…. 이런 살풍경한 청문회장 씬(scene)을 감상하며 자연스레 <악마를 보았다>를 떠올렸다.
당한 대로 돌려주는 '눈눈이이' 정신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러 발전한 개념이 '팃포탯 tit-for-tat'이다. 사전에는 '되갚음', '앙갚음' 등으로 해석돼 있다. '기브앤테이크 give&take'가 신사적인 처세술이라면, 팃포탯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라 하겠다. 피도 눈물도 없다.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피와 눈물의 공통점은 뜨거움일 것이다. 전자는 안으로 흐르는 뜨거움이요, 후자는 바깥으로 흐르는 뜨거움이다. 피가 내 생명의 뜨거움을 의미한다면, 눈물은 남의 생명을 동정할 줄 아는 뜨거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놈이다. 피가 차가운 놈(냉혈한)은 그나마 인간적이랄까.
위장전입, 위장취업, 쪽방촌 투기 등 각종 의혹으로 얼룩진 후보자들의 삶이 '범법'이었다면, 이번 청문회에서 파상 공격을 퍼부은 소위 '청문회 스타'들의 기세는 '국민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식의 '복수'처럼 보였다. 민생(民生)에 살고 죽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우롱했으니, 일면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미심쩍었던 이 세 후보자들이 줄줄이 사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수는 성공했다. 그럼에도 그 복수는 통쾌하지 않다. 오히려 공허하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가 피해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가족에게도 시선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뎅겅! 장경철의 목이 바닥을 구를 때,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장경철의 가족(노부모와 아들) 때문이다. 김수현은 게다가 그 기요틴의 현장에 그들을 불러들이는 기지까지 발휘했다. 경철의 범법과 수현의 복수는 둘 다 피도 눈물도 없다. 악마적이다.
사퇴 의사를 밝힌 후보자들을 보며 그들의 가족을 생각한다.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 들을 생각한다. 목이 잘려나간 그들의 정치 생명이 놀라우리만치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을 자른 '청문회 스타'들은 또 어떠한가. 영화 속 김수현과 다름없다. 복수는 더 이상 짜릿하지 않고 잔혹하다. 국민들은 이 복수극에 지칠 대로 지쳤다. 이번 청문회를 놓고 말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한 의원은 "사필귀정의 결과"라고 평했단다. 글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되묻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
<악마를 보았다>는 정의를 논하는 영화다. 장경철의 죽음이 불편했던 관객들이라면 이번 청문회의 결과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잔혹(cruelty)이 현실(reality)이 돼버린 사회에서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30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현 체제대로 간다면 청문회를 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박 의원은 또 "인사 검증과정에서 정상적인 라인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라인으로 계속 인사 검증이 이뤄지기 때문에 이것은 본인에 대한 상처이자 국민에 대한 상처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며 인사청문회시스템 개선을 강조했다.
이 말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럽게 흐느끼던 수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뭘까.
*영화 리뷰 블로그 '마이너리티 무비 리포트' http://jet_lim.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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