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용기있는 자를 선택한다’는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를 영화의 첫머리로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뿐 아니라 감독이 설파하는 고대사에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면 이 시구는 세 시간에 가까운 대서사시를 열어젖히는 출입문으로는 제격이다. 팍스 로마나의 정점이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리스와 로마인의 용기를 칭송하는 것이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2400년 전 그리스 북부 출신의 정복자의 용기를 1억5천만달러를 들여 되새기는 데는 어떤 역사적 일관성이 관통하는 듯하다. 영화 속에는 통주저음처럼, 세상에 자유를 전파해야 한다는 식의 조지 부시적 이데올로기이자 강박관념이 희미하게 울린다. 알렉산더의 전기를 쓰기도 했으며 알렉산더의 장수 출신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창시자인 프톨레마이오스(앤서니 홉킨스, 천문학자는 동명이인)가 이 거대한 서사시를 말해줄 변사이다. 권위있는 옥스퍼드식 표준 영어로 흘러나오는 연대기는 알렉산더(콜린 파렐)의 서른셋 짧은 삶을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킨 프로메테우스로 격상시킨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 삶은 웅장한 대관식처럼 연출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한쪽 눈에 깊은 상처를 받은 주정뱅이이자 폭군인 아버지 필립포스 2세(발 킬머)와 아버지에게 늘 복수를 벼르며 뱀과 함께 사는 이방인 출신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안젤리나 졸리) 사이에서 짓눌려 있는 젊은이의 초상이다. 영화가 연대기적 구성을 택했음에도 우리가 세계 정복의 지도가 아니라 알렉산더의 내면의 지도에 더 눈길이 쏠리는 까닭이다. 마치 모순에 가득한 알렉산더의 삶을 모순적으로 그려내겠다는 듯이, 올리버 스톤은 직선적인 역사보다는 좀더 모호하고 음영 짙은 문자를 양피지에서 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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