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내 기억 속에 있어.” 교통방송 리포터 서유진(송지효)은 어디선가 본 듯한 전화번호를 자신의 번호라며 알려주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남자 강성주(고수)를 만난 뒤 이렇게 중얼거린다. 마약특별수사본부 강력계 형사 강성주는 경찰로 호송되던 와중에 사라진 100억원어치 마약의 행방을 찾고자 수사에 나선 참이다. 그리고 서유진은 자신과 같은 디지털카메라 동호회에 속한 한 멤버가 마약거래에 연루된 사람인지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단서를 잡으면 다시 끈이 풀리는 미로 같은 사건에 강성주가 깊숙이 다가가는 동안, 서유진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이 과거의 일부였던 듯 이상한 데자뷰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유진이 과거라고 믿었던 그 이미지는 예언이 담긴 미래였다. 어긋나듯 일치하는 현실과 미래. 그 이미지의 중첩을 경험하는 그녀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도심의 ‘현재’ 교통상황을 실시간 알려주는 리포터다. 유진의 환영이 다가올 미래었음을 밝히는 순간부터 <썸>은 예정된 비극을 막기 위해 달려가는 여자와 그 미래를 보지 못하므로 그녀보다 더 빨리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의 속도를 배로 높인다. 용의자였던 인물들이 죽어나가고 엄한 사람이 추궁을 당하며 마약을 가로챈 제3의 인물은 이들 모두를 앞질러간다. 유진이 보는 데자뷰도 점점 위험한 상황을 예고해간다.
<썸>이 <접속> <텔미썸딩>에 이어 장윤현 감독의 상업적 감각을 재확인시키는 대목도 거기 있다. <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운명을 부수었을 때 그것이 철학적 물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서스펜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공들인 자동차 추격신은 빠른 편집리듬을 타며 질주하고, 교통상황 안내를 위해 리포터들이 들여다보는 아홉개의 화면들은 동시간의 서울을 절묘하게 쪼개놓으니, <썸>의 긴박감은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심장을 옥죄어오는 이 긴박감은 아쉽게도 하나의 비밀과 단순한 엔딩만 남기며 맥을 조금 풀리게 한다. 쌀알 쏟아지듯 초반부에 와르르 터진 작은 설정들이 캐릭터를 친절히 설명하지 못하고, 겹겹의 수수께끼 같은 미스터리 구조도 썩 치밀하지는 않다. 그 느슨함을 채우는 건 정서적 효과들이다. 빗물 떨어지는 차창에 통과된 서울의 낯선 이미지와 차 안에서 유진의 교통안내 방송을 듣는 강성주의 얼굴. 감정과 시공간에 대한 이같은 섬세한 관찰력에 힘입어, 미스터리-액션영화 <썸>은 그리 메마르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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