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원작이 아니지만, 영화 <늑대의 유혹>은 왠지 만화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만화적’이라는 별로 새로울 것도, 또 어떤 면에선 상당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지적이 거슬린다면, ‘학원 로맨스물’이라는 좀더 구체적인 범주로 좁혀 두겠다.
알다시피 <늑대의 유혹>을 연출한 사람은 <화산고>의 김태균 감독.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김태균의 전작 <화산고>는 실험적이고도 튀는 비주얼을 감행했던 꽤 매력적인 작품이다. 현실 세계의 ‘학교’라는 공간을 삐딱하게 압축시키며, 이를 비현실적인 설정과 캐릭터로 은유적으로 공격했던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는 무협, 웨스턴, 액션 등을 버무리고, 외적으로는 뮤직비디오, 광고 등의 이미지를 혼융하며 화면의 압도적인 근사함을 선보였다.
물론 그 어둑어둑한 색조 속에 펼쳐지는 화면의 장관들이 스토리적 매력과 쫄깃하게 결합됐는지는 회의적. 그랬던 김태균이 3년만에 새롭게 들고온 <늑대의 유혹>은 그가 미학적 화면 연출이라는 장기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영화다. 특히 ‘힘’을 두고 벌이는 남성 캐릭터들간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격렬한 다툼을 피와 땀이 번들거리는 리얼한 액션 쪽보단 세련된 색감과 빠른 속도감 속에 녹여내는 그의 독특한 미감(美感)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 장기가 어느 곳보다도 강렬하게 분출된 곳은 그 도입부. 예고편에서도 맛배기처럼 보여졌던 도입부는 ‘반해원(조한선)’과 ‘정태성(강동원)’의 대립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두 인물이 지닌 매력을 효과적으로 뽑아낸 장면들이다. 갓 상경한 ‘정한경(이청아)’이 뭔가 다른 공기, 그녀가 걷고 있는 공간의 안정감을 결정적으로 흐트러뜨리고 있는 공기를 감지하며, 두리번거리는 동안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반해원과 정태성의 영상.
결국 그 영상이 구체적으로 펼쳐지면서, 앞으로 엮어질 세 사람의 운명적인 관계가 전조(前兆)처럼 다가오는 동안, 콱콱 새겨지는 ‘늑대의 유혹’ 타이틀은 무척이나 쿨한 스타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또 다시 세 사람이 조우하게 되는 장면은 도입부와는 다른 색깔의 매력을 강도높게 뿜어낸다.
즉, 한경의 우산 속으로 갑자기 뛰어든 얼굴 안 보이는 누군가가 있고, 우산이 살짝 치켜올려지고보니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는 꽃미남 태성이 보인다. 여성 관객들이라면, 대부분 매료되고 마는 그의 모습은 뮤직비디오적인 감각과 어우러지며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새겨지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도 그와 같이 젊고 세련된 감성으로 다듬어진채, 눈을 떼기 힘든 화면의 미감을 발휘한다. 하지만 <늑대의 유혹>의 매력은 여기서 주춤거린다. 귀여니의 소설을 자신만의 화면 연출로, 멋들어지게 엮어낸 김태균 감독이지만 그 스토리 전개는 지나치게 압축적이며 스피드하다.
정한경, 반해원, 정태성이 엮어내는 연애담은 관객들이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미처 동화되기 전에 빠르게 흘러가는데, 그러다 보니 짐작은 하지만 뚜렷하게 스토리를 연결지을 수 없는 빈틈들이 생겨난다. 감초, 혹은 갈등을 조장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조연들이 내러티브와 착착 달라붙지 않은 채 뭔가 붕뜨는 느낌이 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
인물들의 심리를 주로 이미지로 설명하고, 해결하려다 보니 그들이 가진 고민의 실체는 더더욱 모호해지고,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채우는 건 과도하게 꿈틀거리는 이미지의 물질성이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이지만, 등장 인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감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패싸움, 음주 문화, 고급 스포츠카와 오토바이 등등 이 학원 로맨스 속에 비쳐지는 젊음의 코드들은 현실 공간보단, 만화 속 공간에서 익숙한 모습들. 생각해 보면, 눈을 즐겁게 하는 미남 캐릭터들,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전형적인 삼각 관계, 착한 척 하지만 알고 보니 간교한 수완가인 조연 캐릭터도 순정 만화를 뒤적이면 한 두 번쯤 봤음직한 인물들이다.
그걸 탓하자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왜 탓하겠는가. 그런 만화를 좋아하는 장본인인데!). 하지만 주인공들의 로맨스 못지 않게, 그들의 현재적 고민에 다가가고 싶어했다면 너무 고루한 생각일까. <화산고>에서 은유적으로 비판됐던 현실 속의 ‘폐쇄적인 학교’는 <늑대의 유혹>에선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굳이 찾는다면 인물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가정사적인 불행과 맞물린 연애의 고통이랄까. 물론 사랑의 열병이 성장의 터널을 지나는 기본 관문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귀여운 여자 주인공과 반항적 기질의 남자 주인공들을 축으로 급속하게 흘러가는 <늑대의 유혹>은 그 스토리나 주제로는 관객들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안겨줄 것 같진 않다. 멋진 두 남자 주인공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는 여주인공은 판타지를 느끼기 이전에, 그 남성 순종적인 타입에 왠지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게다가 ‘태성’의 죽음을 보여주는 결말부는 신파적이기도 하거니와 지루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어른들도 울리는, 그 녀석들의 트루 로맨스’를 표방하고 있는 <늑대의 유혹>은 어른인 필자를 ‘울리지는’ 않았지만, 그 현란한 화면과 몽환적인 음악은 오랜 시간 머릿 속을 쿵쿵 울릴 것 같다. 그게 아쉽게도 전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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