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발전만큼 장르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호러나 공포는 관객들에 시선을 사로잡기 힘든 우리 영화의 현실에서 김지운 감독의 용기는 놀랍기만하다.
"한국 영화에 다양한 장르를 위한 용기있는 도전"
공포와 스릴러를 절묘하게 섞은 뒤 위트의 묘미를 적절히 살린 데뷔작 <조용한 가족>으로 화려한 출발을 한 뒤 <반칙왕>, <장화, 홍련> 그리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특정한 장르에 얽메이지 않고 여러 장르가 섞이면서도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색다른 맛을 주었다. 또한 매 작품마다 주인공에 특징을 절묘하게 끄집어 내며 배우가 가진 가치를 한껏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흥행작을 이어가던 김지운 감독은 호러영화도 흥행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새 작품으로 고어 스릴러를 선택했다. 영화의 흥행이 연기 잘하는 화려한 배역진이나 탄탄한 스토리가 갖추어지면 당연히 따라 오는 부산물일지라도 피가 낭자하고 잔혹을 넘어 가학적인 영상이 가득한 고어를 적지않은 돈을 주고 극장에 가기 쉽지 않은 현실을 알면서도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 물음에 감독은 한국 영화에 다양한 장르를 구축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흥행 감독이란 호칭을 위해 특정 장르를 고집하지 않은 의연함을 엿볼 수 있기도 했지만 일면 '내가 만들면 고어도 다를 수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이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는 고어에 걸맞게 잔혹하긴 하지만 정통 고어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수위가 조금 낮아 관람이 힘들 정도는 아니라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세지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고어 스릴러도 그가 만들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악마를 보고 내 안에 숨어있던 악마를 보다"
<악마를 보았다>의 시작은 '만약 이런 상황을 당신이라면...?'이란 자문에서 시작한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당신이라면 용서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수현처럼 복수를 하겠습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이다. 그때문에 영화의 스토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죄책감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연쇄 살인자 장경철 (최민식)에게 국정원 요원 김수현 (이병헌)의 약혼자가 무참히 살해 당한 뒤 그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이 큰 뼈대이다. 약혼녀의 유골 앞에서 '네가 당한 것 보다 더 처절하게 복수를 해 주겠다'는 다짐은 복수를 소재로 한 여느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단순해 보이는 복수의 스토리 안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고 풀어가는 과정도 독특하다.
대표적인 것이 수현이 복수하는 방식의 차이다. 수현은 경철을 찾아 낸 뒤 그를 제압하여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고 팔에 골절상을 입힌 뒤 돈까지 주며 살려 준다. 그토록 죽이고 싶은 놈을 만났는데 왜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현은 더 끔찍한 복수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경철에게 위치 추적이 가능한 캡슐을 먹이고 어디로 도망가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다시 만나면 전보다 더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며 제발 죽여달라며 애원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수현의 예상대로 되어가지 않고 거듭 상황이 반전되며 위기를 맞는다. 이점 또한 감독의 연출이 돋보이는 점으로 섣불리 결론을 예측할 수 없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런 과정에서 인물 내면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수현은 악마를 상대하며 악마의 모습이 되어가긴 했지만 진정으로 악마가 될 수 없었기에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건은 전개된다. 잃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악마를 상대하기에 수현은 지켜야할 것이 있는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경철을 우습게 보고 그에게 뉘우침을 바란 것이나 고통과 두려움에 애원하길 바랬던 것 또한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현은 이길 수 없는 악마와의 게임을 해 의미없는 싸움이라 하지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비로소 복수의 헛됨과 괴물을 쫓으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것처럼 악마를 벌하려다 스스로 악마가 되어간 자신을 보며 후회만이 남는다. 결국 원하는 복수를 해서 만족한가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잔인하긴 하지만 고어라고 하기엔 조금 약한 영상"
악마성을 부각시키고 수현의 감정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사용된 잔인한 영상은 상영시간을 가득채운다. 칼이나 총을 비롯해 도끼, 송곳, 쇠파이프 등으로 인체를 파괴한다. 이 중에서 특히 끔찍한 부분은 송곳으로 얼굴을 찌르는 장면이나 칼로 아킬레스를 끊어버리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주변에 뭔가가 없다면 손을 이용해 찢기도 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행동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현을 그렇게 하도록 몰아부친다. 그녀가 당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공포와 고통을 주려는 수현에 입장에선 오히려 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가령 수현은 팔이나 다리를 잘라 똑같이 복수를 하지 않고 도망가 천천히 죽이기 위해 팔을 골절시키고 다리는 아킬레스를 끊은 뒤 응급처치를 해 주며 머리를 둔기로 수차례 내리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잔인한 장면이긴 하지만 정도가 심하진 않다.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다른 영화들에서 사용된 방식과 유사한 연장선에 위치하는 수준이다.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등장한 수준인 영상이기에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보다는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담다보니 보다 강렬하게 받아들여져 고어라는 용어가 틀려 보이진 않는다.
거기에 의외의 웃음을 섞어 강렬한 잔상을 없애준다. 가령 드라이버로 손을 꼽아버려 그걸 스스로 빼는 장면은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의외의 소리(?)가 폭소를 준다. 대상자를 쫒는 과정에서 둔기로 남자의 중요한 부위를 못쓰게 만들어 응급실로 실려간 주위에 경찰들은 연신 멋진 멘트를 날리며 웃음을 주며 경철이 또 다른 범행을 위해 차를 세우는데 승객을 보니 웃음이 절로난다. 악마인 경철이 운전하는 학원 승합차의 후면 거울은 천사처럼 날개가 달려 악마가 운전하는 차와 묘한 대조를 보이며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로 잔인함과 가학적인 영상의 수위를 조절하고 잔상을 오래가지 않게하며 악마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 수현과 경철의 대결과 아쉬운 상황 설정"
<악마를 보았다>의 진정한 묘미는 수현과 경철의 대결이다. 그런 두 인물의 성격과 배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수현은 국정원 소속 요원이다. 그는 경찰보다 비밀스런 정보를 다루고 살인 기술도 온 몸으로 터득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경철이 아무리 잔혹한 살인마라도 수현은 자신이 늘 다루던 익숙한 방식으로 경철을 한수 아래로 보았다. 결국 국정원 출신이라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경철을 우습게 본 것이 화근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된다.
그런 이면에 경철이라는 인물은 안개에 쌓여 있다. 첫 등장부터 악마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사람을 죽이지만 왜 그렇게 변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사진을 본 어머니조차 왜 이렇게 무섭게 변했는지 읖조릴 뿐이다. 경철에게는 아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때는 행복한 가정 생활을 했을 수 있다. 그러던 그가 왜 그토록 무섭고 반사회적 성격장애인이 되었는지의 설명이 없고 무조건 악마의 모습으로만 그려진 점은 수현과의 인물 구도를 이해하는데 부족한 틈을 만든다.
거기에 아무리 국정원 출신이라도 15일의 휴가기간동안 범인으로 의심되는 4명의 출처를 확인한다는 상황은 경찰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듯한 분위기가 풍기고 이런 분위기는 경철이 수현을 만났을 때 경찰을 비하하는 직접적인 대사로 표면화된다. 이번 작품에서 경찰은 이 두 사람의 광기에 대결의 조연들일 뿐으로만 그려지는 점은 역시나 아쉽다.
" 이병헌의 건재와 최민식의 강렬한 복귀"
김지운 감독은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 우리 영화에 다양성이라는 목표와 함께 두 배우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악마대 악마처럼 배우대 배우라는 구도를 만든 것이다.
스타임엔 분명했지만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가진 강렬함의 진가를 확실히 각인시킨 감독이 김지운감독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한순간 흔들린 감정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선우를 연기한 이병헌은 차가운 외모 속에 우수의 눈빛을 가진 배우로 강렬함을 남겼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의 대사를 하는 순간 격정의 감정을 억누르며 눈물을 글썽이는 연기는 단적인 예이다. 그리고 <좋은 놈...>에서 박창이는 조각같은 근육질의 외모만큼이나 무섭도록 차갑고 강했다. 악당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아이.조>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고 후속편도 출연을 확정해 일순간에 인기가 아님을 증명했다. 김지운 감독도 이번 수현은 이병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병헌처럼 이 역에 적임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몰래 화장실에서 수줍게 노래 불러주던 수현의 모습과 함께, 악마에게 행하는 복수를 모두 표현한 이병헌을 보며 역시 이병헌은 현재도 앞으로도 건재할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벙헌만큼이나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며 우리 영화에 한 획을 그었던 배우가 최민식이다. <쉬리>에서 연기한 박무량은 주연이었던 한석규보다 더 인기를 끌었을 정도였고 올드보이에선 최민식이 아니면 지금만큼의 완성도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병헌이 내면의 따듯함에 의외로 강인함을 보여주는 배우라면 최민식은 강인한 외면에 따듯함이 숨겨진 배우이다. 그 예로 <파이란>에서 파이란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방파제에서 눈물을 쏟던 장면을 들 수 있다. 그러다 한동안 최민식의 작품을 볼 수 없었고 최민식은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희말라야에 오르며 희망을 찾아나선 '최'를 연기한 것처럼 최민식은 앞으로 그의 영화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연기를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연기하는 장경철은 정말 악마 그 자체였다. 일면 <친절한 금자씨>와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깊게 패인 눈 속에서 인간미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을 통해 제대로 된 악마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주먹이 운다>이후 실로 5년만에 (<희말아야...>로부터는 2년이지만) 상업영화로 복귀 해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을 남겼기에 실로 화려한 복귀가 아닐 수 없다.
" 매력적인 고어 스릴러"
농담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가 원래 제목대로 <아열대의 (잠못이루는) 밤>이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수현은 잠을 자려 누워도 범인을 잡으려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을 떠 올리게 되지만 왠지 영화 제목으로는 약한 느낌이다. 그리고 애초 최민식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겨줄 감독을 찾았고 김지운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데 만약 다른 감독이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분명 더 고어적인 느낌은 들었을 지 모르지만 배우들이 가진 매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 이들간의 대결의 묘미는 살리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이 영화는 분명 피가 튀고 찌르고 쑤시며 강한 영상이 넘치지만 진짜 재미는 악마간의 대결이고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 대결이다. 그런 점에서 불편한 영상 뒤에 배우들이 가진 매력을 잘 끌어낸 감독의 연출은 놀랍기만 하다.
사상 초유 두번이나 등급 보류를 받을 정도인 영화인만큼 맘은 굳게 먹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지나친 장면은 삭제된만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경철이 행한 것처럼 (팔, 다리, 머리 순서까지 맞춘다) 똑같은 복수를 한 이병헌이 차안에서 거울을 보며 놀랍게 변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돌리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스스로도 변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순간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잔인함 속에 많은 볼거리와 매력이 숨겨져있는 작품 <악마를 보았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감흥은 달라지기 때문에 감독의 농담처럼 2번은 봐야 할 지 모른다. 감독은 이 작품으로 3가지를 말했다. 다양한 장르, 이병헌의 건재, 최민식의 강렬한 복귀... 그 3가지 모두를 이루어 낸 김지운 감독은 참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