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종일관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누구하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없습니다. 일부 사회현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갈등과 아픔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무스(이자벨 까레)는 치명적인 불순물이 가미된 헤로인을 루이(멜빌 푸포)와 같이 투여하다 코마상태까지 갑니다. 루이는 과다투여로 사망하고 무스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루이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죠.
아이를 잉태시키고 세상을 등진 루이의 가족들은 무스가 아이를 지우도록 종용합니다. 그녀도 선뜻 그러마고 약속하고 루이의 집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3-4개월의 시간이 비약하면서 어느 해변가의 조용한 마을로 루이의 동생인 폴(루이 로난 슈아지)이 찾아오게 됩니다. 장례식동안 잠시 얘기를 나눈 것이 전부인 그들은 어색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폴과 루이는 이복형제입니다. 하지만 폴은 그 사실을 성인이 되고서야 알게 됩니다. 다산을 원했던 어머니가 루이를 출산하면서 불임이 된 관계로 폴을 입양했는데, 9달동안 숨어지내다 마치 자신이 출산했다는 듯이 폴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죠. 입양에 대해 너그럽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공개하는 서구의 문화로 볼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들었을 때 폴이 느꼈을 혼란은 엄청났을 겁니다.
게이인 폴(그래서 오종감독의 분신처럼 느껴지는...)에게 처음에는 냉담하게 대하던 무스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던 무스는 폴과 함께 해변으로 나가기도 합니다.(물론 그곳에서 임신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는 중년부인의 설교를 듣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기는 하지만 말이죠.) 아마도 무스가 도피 혹은 피난(제목이 그 뜻일 것입니다.)을 한 것은 그런 목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요인이 적잖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리고 메타톤이라는 헤로인 중독치료제를 복용하면서 요양하는 의미도 있었겠죠. 메타톤 과용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약을 들이킵니다. 즉 도피처에서 무스는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우선인 요양을 하고 있는 것이죠.
무스가 아이를 지우지 못한 이유는 애매합니다. 모성본능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런 책임으로부터의 거부반응이 거셉니다. 영화에 나타난 가장 큰 이유는 루이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하지만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아이에 대한 책임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녀 스스로도 엄마로서의 자격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 갈등은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테고, 그로 인해 우울증 비슷한 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폴과 세르쥬(피에르 루이 칼릭스튜)와 더불어 클럽에도 가고, 세르쥬에게 질투 비슷한 것을 느껴서 자신을 헌팅한 남자를 따라 나서기도 하고, 폴의 피아노 반주에 곁들인 노래을 들으며 평온함을 느끼다가 불같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짧은 폴과의 동거를 마치고 시간은 다시 비약해서 무스는 무사히 출산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라인은 전혀 별다를 것 없는 무색무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색깔을 집어넣고 맛을 내는 것은 섬세한 심리묘사와 독특한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인 캐릭터 설정에 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같지만, 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부모의 자격에 관해, 낙태에 관해, 약물중독에 관해, 입양에 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깁니다.
거울을 통한 표정묘사나 폴이 선탠하고 있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군요. 우울과 갈등에 대해서 썩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임산부 역할을 한 이자벨 까레는 실제 임신한 몸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고 부르는 노래(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반 루이가 헤로인을 기다리며 기타로 연주한 곡도 같은 곡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스가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 모양입니다.)는 루이 로난 슈아지가 직접 만들었다고 크레디트에 나오는 군요. 잘 생긴 얼굴에 예술적 감수성도 좋은 모양입니다. 오종감독의 작품 가운데 접한 영화는 바로 전작인 <리키>가 유일한데, 사뭇 다른 것 같으면서 일맥상통하는 게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의 대표작들인 <스위밍 풀>이나 <8명의 여인들>을 일단 봐야 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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