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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cl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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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31 오전 12: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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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보았습니다. <초록 물고기>의 리얼리티보다 <박하 사탕>의 정직함이 충격적이었고, <오아시스>는 정직함이라 단순히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라 느꼈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찼고, 영화관을 나와서도 한동안 숨을 고르느라 힘들었습니다. 공주의 고통스러운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그게 정상인들의 편견 때문인 것만도 결코 아니고, 종두가 나쁜 녀석이어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퍽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도 없고....
보통 장애인 이야기가 화제가 될 때, 우선은 그들의 극복 체험담을 흔히 다루지요. <나의 왼발>이 그런 영화이지요. 아니면 많은 기록 영화처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비판적으로 다루던가, 그들의 비극적 현실에 조명을 하지요. 이 영화는 특이해요. 물론 사회적 편견과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를 섣불리 비판하려 들지 않지요. 너무나 사실적이에요. 장애인 특혜를 이용하려 드는 공주의 오빠도, 뇌성마비 여자와 관계를 가지려 했던 종두에게 "너 변태 아냐?"라고 묻는 형사도, 이 여자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세상도, 다 그저 우리의 현실일 뿐입니다.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는 모습이어서 비판의 여지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종두에 골머리를 흔드는 그의 형제들도 충분히 이해될 뿐이지요.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젊은 작가, 젊은 감독 이창동은 관객에게 보여 줄 뿐입니다. 묻지도 않고, 더구나 임권택처럼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영화는 도덕교과서나 사회학습서가 아니지요. <취화선>이 잘 만든 듯하면서도 마음에 미진한 것은 감독의 목소리가 생경하게 자꾸 들려서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지 않았던가요? <오아시스>는 장애인 계몽영화도 아니고, 현실비판적인 참여 예술도 아닙니다. 그럼 정말 사랑 이야기인가요?
관객들은 영화의 주인공에게 상당히 우호적으로 접근합니다.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가 등장하면 일단 그들의 사랑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인정하려 듭니다. 아마 마찬가지로 좀 정신이 망가진 남자와 몸이 일그러진 여자의 만남도 우리는 쉬 인정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관계가 우정이라 하면 안 될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라 이름 붙일 명칭이 오히려 번거로웠습니다. 그들은 친구 같기도 하고, 오누이 같기도 하고, 그런 것이 애인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되겠지요. 그저 마음에 담아 두는 관계면 족할 듯해요. 너무 외로운 이들의 마음에 담아 두는 따뜻한 그 무엇이지요.
너무 잘 짜여진 인물이며 구성이 오히려 영화 같지 않지요. 그러나 그래서 문학 작품 같다기보다는 우리네 현실을 다큐로 찍은 것 같다는 이야기지요. 善도 惡도 아니고, 是도 非도 아니고, 그저 우리네 삶의 모습이지요.
여기에 제목의 비밀이 있습니다. 왜 하필 <오아시스>일까? 왜 그 현실 속에 엉뚱한 환상이 등장할까? 소설이 우리네 속내를 지문으로 서술한다면, 영화는 그것을 영상으로 보여주지요. 그뿐입니다. 그이는 우리네 삶이 사막 같았을까요? 그래서 환상 속에서나마 오아시스를 찾고 싶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이건 너무 쉬운 답일까요? 어떻든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호흡을 고르면서, 나도 오아시스가 간절히 그리웠습니다. 목이 말랐어요. 시원한 샘물이 그리웠어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무서운 젊은 감독과 자신의 한계를 끝없이 갱신해 나가는 젊은 배우들이 무서웠어요. 그들이 있는 한국 영화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간과 감자>를 만든 송일곤 감독,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든 임순례 감독, <오아시스>를 만든 이창동 감독, 아름다운 30대입니다.
종두는 왜 끝내 <강간>이 아님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자꾸 머리를 맴돕니다. 그래서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에게는 그이의 말을 들을 귀가 이미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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