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이어 발생하는 끔찍한 아동 관련 범죄들.
인터넷을 살펴 보면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 그 자체이다.
철저한 응징만이 진리처럼 보이고, 이에 반론을 내미는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의미로 기독교의 '네 원수를 사랑하라'란 명제는 이때쯤 어김없이 한묶음으로 욕을 먹는다.
니 가족이었어도 그런소리가 나오나 보자.는 말이다.
물론 나도 내 가족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자신있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거라고는 말 못할거다.
그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상상도 하기 싫은 그 순간에 닥쳤다면 즉각적으로 분노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즉각적인 분노.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분노'를 고스란이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작부터 용서에 대한 교회 설교를 늘어놓던 주인공이 "좆까고 있네"하면서 시작하니 어떤 성격의 영화인지는 바로 감이 온다.
그리고 이후부터 주인공이 겪게되는 일들은 끔찍함의 연속이다. 주인공과 함께 관객은 분노를 키워나간다.
여기에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범인이 등장한다. 조금의 죄책감이나 망설임없이 사람을 쳐죽이고 아이들을 납치하고 부모들을 조롱하며 돈을 뜯어낸다. 저런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냉혈한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주인공이 범인을 돌로 찍어 죽일때의 쾌감을 위해(실제로 상영관에서 누군가 "잘한다!"를 외쳤다) 존재하는 악당같이 느껴진다. 영화적 쾌감을 위한 장치로써의 악당. <데쓰프루프>에 나오는 스턴트맨처럼.
그런데 과연 영화가 이래도 되는 걸까.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보편적인 분노를 끌어내서 그것을 이용해 영화적 쾌감을 주고 의미를 얻고 정의로운 영화가 되면 그걸로 된걸까. 범인 최병철(엄기준)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영화속에서 어디에도 찾을 수 없지만, 그걸로 괜찮은걸까.
음악 애호가라는 점?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싸이코패스들의 예술적 성향은 이제 진부한 클리셰가 되었다. <추격자>의 하정우, <레옹>의 게리 올드만, <양들의 침묵>의 안소니 홉킨스... 관객은 그것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느낄까.
이것은 인간이라는 증거가 아니다. 범인의 광적인 성향(혹은 변태적 성향)을 부각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토드 솔론즈 감독의 <해피니스>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속에서는 평범한 가정의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년에게서 성적 욕망을 갖게되고, 소년들을 범하게 된다. 심지어 그 남자는 어린 아들이 둘이나 있다. 어느날 알게된 아들의 친구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이 남자는 결국 욕망을 참아내지 못하고 그 아이를 성폭행한다.
항상 아들의 성적인 고민들을 상담해주던 아빠는 이제 아들에게 질문을 받게된다. 왜그랬어요? 구체적으로 뭘 한거에요? 느낌이 어땠어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취조 장면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또 그럴거에요?
아빠는 한참을 망설이다 힘겹게 대답한다.
응.
이 영화는 이 남자를 용서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잔인함으로 대한다. 관객입장에서도 보기 불편한 장면들, 이를테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오는 장면이나 아들과의 대화 장면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냥 생략해도 될 것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이 남자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 남자가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한 인간, 아니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대면했을때의 충격. 인간이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을 일을 결국 인간이 저질렀다는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당혹감.
이제 눈물 맺힌 두 남자의 얼굴을 보자. <파괴된 사나이> 포스터의 피해자와 <해피니스>의 가해자. 영화는 두 사람 모두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렇게 인간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만들어지는 것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 인지 모르는 사람도 없다.
단지 가해자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를 포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영화는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것은 영화가 가진 임무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인한 삶의 면도 들여다봐야한다. 보기 불편하고 보기 싫은 면도 봐야한다. 왜냐면 그곳에도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분노를 오락적으로 이용했지만 노골적인 '오락'을 표방하지 않고 진지한 '드라마'를 표방했다는 것이 이 영화가 <데쓰 프루프>와 구별되는 점이다. 분명 분노를 표출시켜주고 대리만족 시켜주는 것도 영화의 임무이다. 하지만 노골적인 분노 표출을 목표로 하면서 오락이 아닌척 하고 있다는 것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결국 진실어린 삶을 말하는 '척'하려고 관객의 값싼 동정심을 유발하고 분노를 이끌어낼 뿐이다.
그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피로함을 느꼈던 이유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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