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내곁에]로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이 돌아왔다. 흔히 말하는 연기본좌의 귀환이라신다. 김명민은 오랜 관록을 지닌 배우지만 뒤늦게 브라운관으로 명성을 쌓아 스크린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리턴]에서는 연기도 좋고, 작품도 좋았는데 그 영화는 여러모로 불운했었나보다. [무방비도시] 같은 경우도 손예진이 더욱 부각되고 김해숙의 열연으로 김명민은 살짝 가려졌었다. 그리고 선택한 스크린 복귀작 [내사랑내곁에]로 작년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언제나 평균 이상의 연기력을 분출하기 때문에, 이젠 기준치가 너무 높아진 것일까? [파괴된사나이]를 보고 그의 연기에 대한 감탄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냥 김명민이구나! 김명민의 연기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김명민의 연기는 웬만한 배우들의 열연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파괴된사나이]는 김명민의 이력 면에서나 스릴러의 장르 면에서나 그야말로 무난한 영화다. 김명민을 좋아하거나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수작의 가치를 해낸다. 다만 문제는 시각적인 영상이나 정서적 유대에 있어서 불편하다는 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 영화는 유괴를 소재로 한다. 그 어떤 범죄든지 나쁜 것이고 끔찍한 것이지만 특히 성범죄나 어린이 유괴 같은 경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불편하게 만든다. 연기를 잘 하고 연출이 잘 되고를 떠나, 관객은 일반대중으로서 정서적 불편을 견디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영화는 싸이코패스를 소재로 한다. 김명민만을 믿고 영화관을 찾은 순수한 관객이라면 엄기준의 도끼 난도질이나, 거침없는 칼질에 눈이 희번덕거릴 소지가 다분하다. [검은집]에서 처음 싸이코패스가 캐릭터로 등장하였고 [추격자]에서 하정우의 연기가 그 정점을 찍었지만, 이번 엄기준의 살인마 연기는 한층 더 심도 있는 싸이코패스를 창조해냈다. 다소 밋밋할 수도, 뜨뜻미지근할 수도 있는 영화지만 그래도 엄기준이 도드라진 방점을 찍어주니 스릴러 매니아라면 반색할 일이다.
이젠 핸디캡이 아닌 단점을 지적해 보자면 구태의연한 연출이 너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긴장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적정 수준의 스릴을 느낄 수 있고 극의 몰입도도 상당한 편이다. 다만 예측불허의 긴장감을 만나볼 수는 없다. 뻔히 알고 이미 탄식이 나오고 상상이 가기에 진부하다는 약점을 잡아낼 수밖에 없다. [세븐데이즈]나 [그놈목소리]처럼 유괴라는 설정으로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세븐데이즈]처럼 치밀한 얼개는 없고, [그놈목소리]처럼 감정적으로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냉철하지도 못하고 드라마틱하지도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꼭 그 중간 지점에서 관조적인 상념을 흩뿌린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한국형 스릴러나 공포는 상투적으로 안고 있는 약점이 있다. 장르에 충실하다가도 꼭 결말에는 엄청난 사연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슬픈 관념을 부각시켜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단점이다. 물론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파괴된사나이]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수용된 것 같다. 특히 엄기준 캐릭터에 대한 부분이 호불호를 나뉘게 할 듯 싶다. 이야기의 전개는 제목 그대로 한 사나이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수석 의사경력을 과감히 버리고 목사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종교적 신념을 갖고 가정적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하던 한 남자, 딸의 유괴와 실종 그리고 미제 사건으로 종결 처리되면서 그 사나이는 타락해져만 간다. 종교적 불신으로 그 도그마에 침을 뱉는 듯한 전직 목사의 욕지거리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할 것이다. 문득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오른다. 그 영화를 복기하며 [파괴된사나이]는 그 잔재된 상념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현실로 너에게 닥친다면 당신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하는 예리한 물음이 뇌리를 스쳤다.
"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할지어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할지어다 "
김명민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역설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8년이 지나고 파괴된 사나이는 양아치의 풍채를 하고 있다. 그리고 8년 전 원점의 상황이 되풀이 되면서 영화는 다시 스릴러의 표피를 두른 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향한다. 결말에 이르러 [밀양]처럼 용서와 구원에 대해 철학적 깊이를 갖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약간 노선을 바꿔 간절함에 대해서 말한다. 딸의 물음에 눈물을 흘리며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김명민의 심정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 채 엔딩크레딧은 올라간다. 가슴이 먹먹하다. 누군가에게 간절함이,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이고 귀찮음이 될 수 있다는 이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그게 가족관계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애달팠다. 딸아이의 날카로운 물음 앞에 한 장면이 서서히 디졸브 되었다. 생전에 잊지 못하고 8년을 한결 같이 딸을 찾던 어머니, 몹시 간절하게 실종전단지를 돌리던 그 어머니의 손길이 불특정 다수에 의해 내쳐지던 바로 그 장면이다.
결국 전방위적으로 [파괴된사나이]는 뭔가 고루한 부분이 내재한다. 고루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타파할 것은 타파하고 새롭게 취할 것은 취해서 시의적절하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안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살인의추억]이나 [추격자]같은 선례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꽤 수작으로 평가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맹점이자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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