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
이미 50년 전에 한국영화계에서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를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故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다소 의아했다. 서스펜스와는 관련이 없어보이던 그가 서스펜스물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언뜻 떠오르지 않아서다. 홍보 과정에서 '에로틱 서스펜스'라는 부분이 부각되면서도 임상수 감독이 과연 '서스펜스'라는 말을 이렇게 카피에까지 내세울 만큼 구현을 잘 했을까 하는 궁금함이 앞섰다. 빤한 불륜 치정극을 뛰어넘는 근원적인 서스펜스 말이다.
그러나 역시나, 나는 예고편과 홍보물에 낚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이라고 보기 힘들다. 추리나 반전의 요소가(결말을 빼면) 없고, 그렇다고 서스펜스가 영화 전체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완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녀>를 결코 빤하지 않은 결과물로 바꿔놓은 듯 하다. 일단 그렇고 그런 불륜 치정극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이 영화는, 임상수 감독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시각이 매우 선명하게 투영된, 우아하고도 잔혹한 블랙 코미디 비극이다.
이혼을 겪은 뒤 고시원의 좁디 좁은 방에서 기거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생계를 이어오던 은이(전도연)가 어느날 최상류층 일가의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매우 무뚝뚝하고 깐깐해 보이는 그 집의 나이 든 하녀 병식(윤여정)의 지도 아래 순진하고 착한 은이는 이 으리으리한 집 안에서의 생활을 배워나간다. 이 집의 가장인 훈(이정재)은 병식에게 '여사님'이라는 존칭을 쓸 만큼 매우 매너있는 신사같고, 쌍둥이를 임신한 안주인 해라(서우)는 좀 철없는 아이같긴 하지만 은이에게 비교적 친절한 편이다. 이 집의 딸인 나미(안서현)는 은이를 엄마 못지 않게 따르고 존중하는 착한 아이다. 그러던 중, 온 가족이 휴가를 온 별장에서 은이는 와인에 취한 훈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된다. 해라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은이와 훈의 부적절한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지지만, 병식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나아가 은이가 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그들은 어느덧 파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배우들의 노출, 파격적인 정사신 등이 큰 화제가 되었지만 막상 영화는 그렇게 대놓고 파격을 달리지 않는다. 전도연이 노출을 꽤 여러번 하지만 에로틱하다기보다 일상처럼 묘사되고, 정사신이 등장하긴 하지만 직접적인 노출보다 대사나 소리 위주로 표현되고 극도의 클로즈업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황을 관객들의 상상에 맡길 뿐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하녀>는 거의 모든 면에서 과잉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로 잰 듯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며, 자칫 찔릴 것처럼 예리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만족스럽다. 전도연이 맡은 은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강렬해 보일 수 있는 역할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즈같은 역할은 아니라는 뜻이다. 집의 바깥주인과 부적절한 관계에 말려드는 불륜의 주인공이지만 워낙에 세상 물정에 대해서 순박했던 그녀는 그 대가로 팜므파탈처럼 집안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려기보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찍소리라도 내는' 정도에 머문다. (그러나 그 '찍소리'는 관객들에게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은이의 캐릭터에 걸맞게 전도연은 겉으로는 폭발하지 않는 한편, 속으로 삭히다 결국 참혹하게 곪아터지는 여인의 모습을 절제된 연기로 보여주었다. 한없이 순진하고 착한 한편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내던지는, 투명한 한편 한번 깨지면 무서운 흉기가 되는 유리같은 양면적인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순수함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광기로 되돌아오는, 전도연 자신의 말처럼 쉽게 이해되지 못했을 캐릭터는 놀랍게도 그녀는 영화 속에서 이해가 되게 풀어냈다.
전도연과 함께 영화 속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다름 아닌 병식 역의 윤여정 씨다. 영화 속에서 일종의 대척점을 형성하고 있는 훈 일가와 은이 사이에서 관찰자 역할을 하는 병식은 비현실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인물들 속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교양 있어 보이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정한 일들에 놀라기보다는 오랜 경험으로 인해 '그럼 그렇지' 하며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하녀'라는 위치에 서 있는 여인으로서 그 어떤 굴욕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티고 있어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치의 과장도 미숙함도 없이 정밀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도 아찔하게 건드린다. 일할 때는 돌처럼 아무 감정 없이 일하고, 일을 끝나고 돌아와서는 여느 아줌마들처럼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세상을 향해 야유를 퍼붓는 모습을 통해 영화 속에서 가장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캐릭터로서 조연이 아닌, 중요한 관찰자의 역할을 멋지게 보여주었다.
훈 역의 이정재와 해라 역의 서우도 각각 위선으로 찌든 신사와 여전히 덜 자란 유부녀라는 캐릭터를 꽤 걸맞게 보여주었다. 이정재는 이전까지는 빈틈없는 매너남 역할을 주로 맡았다면 이번에는 빈틈없는 매너남인 척 하는 위선자 역할을 맡았는데, 기존의 캐릭터를 살짝 비틈으로 인해서 전혀 다른 인상을 보여준다. 순식간에 '멋지신 분'과 '더러운 놈'의 경계를 오가는 연기가 일품이다.서우는 최상류층 집안의 안주인이라는 무거운 위치이지만 과연 이끌어갈 능력이 될까 의심스러울 만큼 주체성이 없어 보이는 캐릭터를 과장되지 않게 보여주었다. 쟁쟁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 신인에 가까운 그녀이지만 해라의 캐릭터가 훌륭하게 그녀에게 맞춰진 듯 보였다. 더불어 사건을 더욱 악화일로로 몰아넣는 해라의 어머니이자 훈의 장모 역의 박지영이 보여주는 표독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런 연기도 인상적이다.
<하녀>는 제작 단계부터 화려한 세트와 정교한 미술 등으로 화제를 모았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대저택의 위엄은 '저 집은 무슨 일을 하길래 저런 집에서 살까'하는 궁금증이 절로 일 만큼 스펙터클했고, 곳곳을 수놓은 미술 또한 눈을 한껏 호강시킬 만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매끈한 명품 치정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렇게 화려한 배경이 결국은 임상수 감독이 파놓은 일종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화려한 대저택의 위용은, 극을 찬란하게 떠받들어주는 배경이라기보다 철저한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집 곳곳, 먹음직스런 음식과 교양 있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마치 '돈XX한다'라고 영화 곳곳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영화가 노려보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 이전에 자본주의의 천박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사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예고된다. 화려한 유흥가 사이로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듯 매달린 여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바쁘게 놀고 먹는 사람들, 그들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휘황찬란한 밤 속에서, 그들(곧 우리들)은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마시고 먹고 놀기에 바쁘다. 그 사이에서 어느 여자가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으나 투신한다. 그리고 그 화려한 밤 속에서 여자의 흔적은 곧 사건 현장에서 흔히 보이는 하얗게 그려진 윤곽과 핏자국으로 남는다. 그러나 돈과 쾌락이 엉킨 밤은 여전히 계속된다. 본격적인 사건의 현장인 대저택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이 이러한 현장부터 보여주는 것은,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이런 분위기의 시선이 견지될 것임을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 부대끼던 은이 역시 비슷한 운명에 휘말릴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은이가 대저택에 들어서기 전의 현장은 대저택과는 다르게 매우 현실적이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면서 한 명이 살아도 비좁을 고시원에서 두 명이 먹고 자는 풍경은, 외면하고 싶지만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팍팍한 삶 그 자체이다. 돈이라는 것의 비정함이 곳곳에 스며 있는 사회이지만 은이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곧 허리 펴고 살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간다. 자본주의의 비정함에 무감각한 은이의 모습은 한편으론 거기에 순응하는 게 익숙해져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 듯 하다.
그런 그녀에게 펼쳐지는 대저택 속의 풍경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극에 달한 매우 극단적이고 연극적인 현장이다. 가졌냐 못가졌냐가 사람의 위치를 갈라놓고,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람의 태도를 바꾸어놓는다. 전근대적인 시스템처럼 여겨지는 주인과 하녀의 관계(그러나 여전히 현재 부잣집 곳곳에는 이런 관계가 남아 있을 것이다.)가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이 집 안에서, 훈과 해라는 언뜻 보기에는 매우 매너있고 친절해 보인다. '내가 먹는 밥 해주실 분인데 중요한 분이잖아요'라면서 소중하게 대하는 듯 하고, '고맙다'는 말로 그들이 하녀로부터 받는 서비스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예의도 지닌 듯 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습관적으로 그들의 행동 곳곳에 배인 태도는 여전히 하녀들을 그들보다 한 단계 낮은 인격을 지닌 종으로 대할 뿐이다. 철없는 아이같은 주인이 어머니 내지는 할머니뻘의 하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부지기수로 목격되지만, 하녀는 꼼짝도 못한다. 그들은 못가졌고, 주인은 가졌기 때문에. 주인이 그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주인집 여자가 하녀보다 나이가 어린 것으로 설정된 것이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지금은 매우 적절한 설정으로 느껴진다.)
그들 사이의 이러한 부조리한 관계는 은이와 훈의 비밀스런 관계를 통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훈이 은이에게 접근하는 것은 결코 사랑과 같은 다른 감정 때문이 아닌 듯 보인다. 그저 임신중인 아내를 대신에 욕망을 해소할 대리인일 뿐. 때문에 그들의 정사도 교감이라기보다 급하고 폭력적이다.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도 않는다. 그저 거액의 보답을 하는 것이 다이다. 급기야 주인에게 하녀가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으로까지 변질되는 것이다. (무슨 공기인형도 아니고) 이처럼 이 집안에서는 돈만 있다면 그 어떤 욕구를 해소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 어떤 가치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여진다. 훈 일가는 자신들의 유혹에 모든 것을 줘 버린 은이를 천박하다며 조롱하지만, 이쯤 되면 돈 앞에 모든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훈 일가도 한없이 천박해지고 만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지배하는 집 안에서 은이가 정신 나간 여자로 취급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안에선 아이 또한 돈만 쥐어준다면 얼마든지 지울 수 있는 혹같은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순수하고 인간적이었던 은이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돈이라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은 은이가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고, 하물며 이 집구석은 더하다. 결국 은이는 찍소리라도 내 보려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현장 속에서 훈 일가와 은이를 대립각으로 설정하여 돈과 인간이 빚어내는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웃길 뿐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특유의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날리는 대사와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냉소적인 표현을 통해 이들의 비극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면서도 그 어느 경우보다 잔혹하게 펼쳐진다. 누구의 죽음도 그 어떤 극단적 상황도 길게 끌고 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그 어떤 개개인의 발악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잘만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비정한 수레바퀴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하나의 불씨가 있다면 훈 일가 중 은이와 유일하게 진심으로 교감하는 딸 나미다. 싹수 노란 아버지로부터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겉으로 보면 상대방을 높이는 듯 보이지만 실은 나를 높이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배워서인지 은이에게도 친절하게 대하지만, 알고보면 그녀는 병식 못지 않게 중요한 순간들을 곳곳에서 목격하는 인물이다.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인간들을 호령하는 이 집안의 균열을 나미는 어른들이 모르는 사이에 곳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매우 비정한 분위기로 흘러가지만, 이러한 나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감독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선택의 기로를 마련해 놓은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엔딩에 이르러 그 생각은 꽤 확실해진다. 무슨 촌극처럼 뜬금없이 영어로 지껄이는 훈과 해라. 그들이 마치 약에 취한 듯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가운데 나미는 매우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과연 그 눈빛은 무엇이었을까. 천박한 자본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일종의 S.O.S일까.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그 문제를 뚜렷하게 인식한다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지, 안다구' 하면서도 우리는 어느 순간 돈을 위해 인격적 모독마저 감수하고 있을지 모르고, 돈의 힘을 믿고 누군가의 가치관을 무참히 짓밟을지도 모른다. 누가 더 천박하다고 따질 수 있을까. <하녀>가 날리는 경멸은 결국 잘 알면서도 묵인하고 스스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야비한 자본주의의 늪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