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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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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오후 7: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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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세상의 흐름과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예술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예술에 사회의 공기가 반영되는 것이 예술의 의미를 더욱 격상시켜주느냐 아니면 오히려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자에 서 있다. 창작자가 단순히 개인소장용, 개인만족용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지 않는 이상, 그 작품은 어떻게든 대중과 소통하게 되어 있고, 대중의 입장에서는 사회와 어느 정도 소통의 여지가 있는 예술 작품이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만큼 대중으로의 전파력이 큰 예술 장르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홀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무시못할 그 영향력을 그저 썩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힘이 있으면서 쓰지 않는 것도 일종의 낭비인 것이다.
<작은 연못>은 아마 이러한 예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나온 영화일 것이다. 그냥 사람이 나와서 연설하듯이 풀어놓으면 좀처럼 집중하지 않을 이야기도, 영화나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등장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을 집중하게 할 수 있다. 예술이 그저 예술 자체에서 오는 감흥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의 의식을 더 분명하게 깨울 수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작은 연못>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니다. 자칫 우리가 실체도 제대로 모르는 과거의 어느 작은 사건으로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로 마음에 담는 것이다. 어떤 행동도 촉발하지 않는다. 그저 알기를, 기억하기를 바랄 뿐.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1개월 남짓 된 1950년 7월 23일, 한반도 허리쯤에 있는 대문바위골이라는 작은 마을은 그래도 아직 비교적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 아직 전쟁의 기운이 마을까지는 다가오지 못한 것. 짱이(신명철)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열릴 전국동요경연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학교에서 아웅다웅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어르신들은 두런두런 마을 바깥에 둘러앉아 바둑 두기로 소일한다. 바깥상황이 어떤지 알 길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순박하게도 마을 어귀에 있는 대문바위가 주민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전선이 마을 근방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마을에도 전운이 감돈다. 일본인 통역사가 미군들과 함께 와서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마을 사람들은 즉시 대피하라고 전한다. 정신없이 부랴부랴 짐을 싼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마을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이 피난 트럭을 몰고 올 것이라는 얘기에 힘들어도 여정을 계속하지만 갑자기 상황이 급변한다.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폭탄세례를 퍼붓고,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무기도 갖고 있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피난길은 순식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참혹한 현장으로 바뀐다.
수많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대다수가 이상우 감독이 이끄는 극단 '차이무' 출신이다) 누구 하나의 연기가 두드러진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주인공을 꼽자면 대문바위골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고, 그들이 지났던 장소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누구의 연기가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밋밋한 것은 아니다. 이미 연극을 통해 실력을 갈고 닦았던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튀지 않으면서도 생명력 넘치게 연기하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을 힘차게 구현한다. 문성근, 전혜진, 강신일, 故 박광정, 이대연, 김뢰하, 이성민, 정석용 등의 배우들에다 송강호, 문소리 같은 주연급 배우들도 단역을 마다하지 않으며 이 영화에 모습을 비추었는데, 모두가 쟁쟁한 배우들임에도 영화 속에서는 그 빛을 숨기고 온전히 대문바위골 마을 사람들이 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자신들의 존재감은 죽이면서도, 캐릭터의 생동감은 살린다.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배우의 능력임에 틀림없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를 감독한 이상우 씨는 연극 연출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다보면 연극과 같은 성격이 은근히 잘 드러나는 듯 하다. 덕분에 영화는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들인다. 일단 장면 전환이 차분하다. 초반부 마을 풍경을 비출 때 영화는 활발한 컷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비춘다기보다 한 지점에서 부대끼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 놀음 때문에 또 다투는 부부, 전쟁 때문에 외가로 내려온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나며 자신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이것은 연극을 볼 때 제한된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교차해가며 풀어놓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감정을 지나치게 소비하지 않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연극은 러닝타임은 영화와 비슷하지만 다른 장치보다도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관객의 감정을 쉽게 끌어올렸다 내렸다 하지 않는다. 점진적으로 갈등을 쌓아올렸다가 결말에 가서 묵직한 한 방으로 웃음이나 울음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깊은 여운을 남길 때가 많다. <작은 연못>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음악이나 이미지 묘사에 있어서 최대한 관객들에게 극한의 감정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이를 (아마도)의도적으로 지양한다. 극도로 감정을 끄집어내는 음악의 사용은 절제하고, 참상의 순간도 자극적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건이 벌어지던 아비규환의 순간을 그저 전달하려 할 뿐, 그것을 빌미로 관객들로부터 눈물을 있는대로 짜내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곧 이 영화가 그저 관객들을 울리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오히려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판타지적 요소까지 등장한다. 피난길에 하늘을 지나다니는 어미고래와 아기고래의 이미지가 등장하고, 후반부 다리 밑에서 또 한번 총알 세례에 희생당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소녀의 꿈과 현실을 교묘히 오가며 약간 몽환적으로 묘사된다. 꿈 장면이나 고래 이미지의 등장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들은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미 한차례 참혹한 순간을 겪고 난 뒤에 부유하는 허망한 환상으로서 목구멍으로부터 쓴맛을 유발하는 그런 장치인 듯 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과 너무나 달라서 더 슬프게 가슴을 때리는 환상 말이다.
이처럼 <작은 연못>은 생각보다 역사의 슬픔에 악착같이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한발짝 물러나서 침착하게 바라본다. 배우들의 연기, 참혹한 현장을 비추는 카메라의 태도, 음악 등 어느 한 군데도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은 역시 이 영화의 목적이 실제 사건으로 극적인 감흥을 주기 위함이 아닌,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실제 사건을 알게 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한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덕분에, 관객들은 오히려 사건의 끔찍한 단면을 더욱 끔찍하게 목격한다. 눈 비비고 다시 보면 분명 이건 말도 안되는 사건인데, 그것이 지금 눈앞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벌어지고 있어서 소름이 끼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아날로그 액션물처럼 영화에서는 폭탄세례나 총알세례 장면을 건조하게 담는다. 그러나 이런 세례를 당하는 사람은 중무장한 군인도 아니고, '제이슨 본'처럼 고도의 훈련을 받은 특수요원도 아니다. 이 정도의 폭력은 살면서 생각도 해본 적 없고, 대단한 영웅심리같은 것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에만 매진했던 벽촌 사람들이다. 농기구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꿰고 있을지라도 무기라고는 전혀 아는 게 없는,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게 험한 말도 쉽게 못할 만큼 폭력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순수한 삶을 살아왔든 말든, 총알은 이들의 몸을 관통하고 폭탄은 이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여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총을 맞으며 온갖 명대사를 하며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놀라기만 하다 세상을 떠나고, 그 어떤 말이라도 남기려 하기 무섭게 무기력하게 픽픽 쓰러진다. 차마 영웅처럼 나설 용기가 없는 이 평범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선택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순간을 최대한 끌면서 미화하기보다 언제 일어났나 싶을 정도로 무심하게 다룬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가 그들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당시 그들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몰아넣었던 현실이 무심했다는 뜻이다. 사상 문제인지 이념 문제인지 위에서는 그 난리가 나던 와중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살아가던 이들인데,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날아온 총알과 폭탄에 그들은 여느 영화 속 엑스트라 마냥 힘없이 죽어간다. 영화는 이렇게 침착한 묘사를 통해 오히려 우리에게 뜨겁게 묻는다. 이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아무 힘도 없이 열심히만 살아오던 사람들의 목숨을 그들도 모르는 새에 순식간에 끊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이유 없는 죽음이기에 공포와 분노와 슬픔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그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작은 연못>은 비극만으로 관객들을 좌절에 빠뜨리려 하지는 않는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참혹한 기억을 뒤로 한 채 얼마의 시간이 흘러 등장하는 결말이 그것을 말해준다. 산 사람들은 그들대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종적을 감추었던 이들은 끝끝내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붙들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마을 사람들에게 높은 곳에서 보상 차원의 일을 해주었을리 만무하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게 50여년이 흐른 2005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니)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일어선다. 아픔을 뒤로 하고 다시 서로를 만났다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이러한 결말의 어조는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건, 단지 이것이 인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가 너무나 멀쩡하고 행복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삶 이전에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덕분에 지금의 정도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저 편하다고 해서 지난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모르거나 잊어버린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쓰디쓰고 아프더라도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해야 할 것임을 <작은 연못>은 이야기하고 있다. 자칫 사상이나 이념 문제로 흐를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가 찬양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위에서 그 어떤 참혹한 일이 벌어져도 끝내는 모든 걸 딛고 일어서고야 마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높은 힘이다.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진실, 놓치지 말아야 할 힘을 이야기하기 위해 수백명의 배우들과 스탭이 자진해서 모여 8년이나 걸린 끝에 완성 영화란다. 그들의 의지가 헛되지 않을 만큼, 영화 속에는 우리를 깨어나게 하기 충분한 역사의 순간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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