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대로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가 있는 노래를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슬프다. '후크송'이라는 이름 하에 지속되고 있는 이 유행의 바람은 어떤 성찰이나 추억 따위는 버린지 오래인 채,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얼거리게 할까 고민하다가 나온 성의없는 가사들을 꾸준히 낳고 있다. 가사는 결국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단지 멜로디만 있으면 심심할까봐 노래를 채우는 단어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귀에 훅훅 감기는 중독성은 잠깐 유행을 타지만 마음을 흔드는 가사는 평생 갈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래서 요즘은 주류 대중가요보다 인디 뮤지션이나 차라리 팝을 더 많이 찾게 되는 듯 하다.
그런데 주옥같은 노래 가사는 대개 경험에서 많이 나온다고들 한다. 경험해 본 사람만큼이나 그 상황에 대해 제대로 느끼는 이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인생이 고달프고 굴곡이 많을 수록 더 드라마틱한 노래 가사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긴가. 매몰차게 들리겠지만, <크레이지 하트>는 그것이 순리라고 얘기한다. 쓰라린 인생이 끝내는 감동적인 노래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는 한때는 직접 쓴 노래들로 남 부럽지 않게 잘 나갔지만 지금은 퇴물 가수가 되어 시골의 작은 술집이나 볼링장을 전전하며 공연을 하고 있다. 무대에 서고자 하는 의지는 변함이 없지만 술과 담배를 입에서 뗄 줄 모르는 그의 방탕한 생활은 그의 가수 생활을 점점 위태롭게 한다. 또한 자신이 키운 제자이자 지금은 톱스타가 된 토미 스윗(콜린 파렐)에 대한 열등감도 꾸준히 그를 괴롭힌다. 그러던 중 들른 어느 마을에서 그는 술집 주인의 부탁으로 기자 지망생인 진 크래독(매기 질렌할)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배드는 진의 사려 깊은 시선에 매료되고, 진 역시 거친 듯한 겉모습 뒤에 숨은 배드의 진실된 마음을 알아가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살던 배드는 이 사랑을 계기로 조금씩 다시 뜨겁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키워나간다.
<크레이지 하트>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평범한 영화다. 퇴물 가수가 사랑을 만나면서 재기의 몸짓을 펼친다는 내용은 숱한 영화들에서 본 듯한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고 이것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도 영화는 결코 튀지 않고 조용조용히, 평탄하게 이끌어간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크레이지 하트>는 평범한 영화가 아니다. 아니나다를까, 주인공 제프 브리지스부터 시작해서 곳곳에서 만나는 배우들마다 어찌 그리 순도 100%의 알찬 연기를 보여주는지. 매번 생동감 있는 배우들의 연기는 조용한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를 잠시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배드 블레이크 역의 제프 브리지스는 그 중에서도 당연히 왕에 해당한다. 사실 그가 비록 시상식에서 여러 번 외면 당하긴 했지만 연기를 매우 잘한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의 완벽한 연기가 크게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이 배드 블레이크라는 역할에 그가 아닌 다른 배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그의 연기는 캐릭터의 존재감을 100% 또는 그 이상으로 충족시킨다. 거칠면서도 둔한 말투와 알콜에 찌든 무거운 눈빛, 무거운 몸짓은 배드 블레이크가 살아온 고단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부르는 노래 역시도 출중해서, 멜로디가 넘어가는 곡절마다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 연기하고 있다'는 듯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최상의 연기가 된다.
비단 제프 브리지스 뿐이 아니다. 배드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진 크래독 역의 매기 질렌할이 보여주는 현실적인 여성의 모습도 은근히 가슴을 저민다. 이혼을 겪고 아이를 둔 엄마로서 애써 밝은 척 애쓰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아픔이 때때로 터져 나올 때에는 관객도 울컥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호소력을 보여준다. 배드의 삶을 껴안는 이상적 여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여인의 모습이다. 너무 절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희망적이지도 않은 채, 삶의 고단함이 있는 그대로 묻어나는 그녀의 연기는 매우 자연스럽다. 배드의 휴스턴 친구로서 술집 주인이기도 한 웨인 역의 로버트 듀발은 많지 않은 비중이지만 똑같이 힘든 상황에서 애써 밝아지려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은근히 짠한 비애감을 불러오며 노장 배우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특별 출연 급인 토미 스윗 역의 콜린 파렐의 예상외로 '싸가지 있는' 모습과 꽤 매끈한 노래 실력도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드는 핵심은 연기와 음악이다. 스토리는 탄탄하다고 할 수 없고, 대사가 뒤통수 칠 만큼 유려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이다. 삶의 무게를 한 짐씩 지고 있는 듯 절절하게 다가오는 배우들의 연기는 전형적인 이야기마저도 새삼 애틋하게 만들고, 중간중간 애잔하게 깔리는 노래들은 영화 내내 풍기는 비애적 분위기를 더 짙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보여지는 현실 속 인물들의 모습과 중간중간 흐르는 노래들은 떨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의 인생은 곧 노래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눈물과 아픔이 배어 있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때론 얼마나 주옥같은 노래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컨트리는 우리나라에선 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선 여전히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국민장르다. 현재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캐리 언더우드, 레이디 앤터벨럼 등의 활약으로 그 인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 요즘 인기 있는 컨트리 장르의 음악들은 대부분이 팝이나 락적인 부분이 가미되어 미국 이외 다른 나라 사람들도 거부감없이 들을 수 있게 변형된 방식이다. 그에 비해 <크레이지 하트>에 나오는 이른바 '정통 컨트리'는 상대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보컬도 다소 끈적끈적하다. 때문에 미국 토박이 사람이 아니면 약간 이질감이 생길 수도 있는 장르다. (영화 속에서도 배드가 이런 이유로 퇴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삶이 녹아 들면서, 무겁고 끈적끈적한 구석이 있는 이 음악은 어느덧 삶의 희노애락을 그대로 옮겨놓은 짠한 발자취가 된다.
자신의 노래들은 모두 자신이 곡을 썼던 배드 블레이크에게 있어서 곡을 쓸 수 있는 영감의 중요한 원천은 그가 직접 얘기했듯이 그의 인생이다. 굳이 몇날 며칠을 고민하지 않아도 지나 온 삶과 그 때 느꼈던 감정을 불현듯 떠올리면 그것은 어느덧 유려한 가사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만큼 그 가사는 그의 입으로부터 차마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과 얽혀져 흘러 나온다. 인위적인 기교가 없이도 지난 인생의 감정이 고스란히 응축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노래의 감흥을 절정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래는 배우에게는 또 다른 연기이고, 영화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인 셈이다. 배우의 대사나 표정 뿐 아니라,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뭔가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이해는 갈 것만 같은 감성은 다른 영화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흔치 않은 경험을 통해, '고달픈 인생도 결국은 멋진 노래처럼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익숙한 메시지는 또 한번 뭉클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우리가 어떤 노래를 기억할 때 때로는 노래 자체의 특징보다도 그 노래를 들었던 당시 상황과 연결을 짓듯이, 노래와 인생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크레이지 하트>는 이 불변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에 굳이 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아도, 노래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 노래를 전하는 가수의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멋들어진 연기가 된다. 그래서인지 똑같은 노래라도 듣기 좋게 윤색된 토미의 버전보다 당사자의 희노애락이 그대로 담긴 배드의 끈적한 버전이 왠지 더 진하게 와닿는다. 누추한 인생은 그 무엇보다 매혹적인 가사가 되고, 아픔을 맛본 가수는 그 누구보다 멋진 퍼포머가 되는 것이다.
+ 영화 속 노래들의 가사가 번역되어 자막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그나마 영어 가사를 조금이나마 해석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가사도 번역되어 나왔더라면 영화의 감동이 더욱 배가되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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