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통해 떠올릴 수 있는 영국의 이미지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21세기 들어 판타지 영화들(이들은 열에 아홉은 영국식 억양을 구사한다)의 득세로 얻게 된 신비롭고 품격 있는 이미지, 숱한 워킹 타이틀표 로맨틱 코미디들의 인기로 얻게 된 낭만적 로맨스의 이미지, 그리고 따박따박 따지는 듯 억센 억양이 연상시키는 다소 괴팍하고 무뚝뚝한 이미지. 앞의 두 이미지는 전세계 진출에 성공한 영국산 영화들이나, 영국의 몸을 빌린 할리우드 영화들에 힘입어 영국의 대표적인 브랜드 이미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 하나, 그나마 사실적이라고 볼 수 있는 괴팍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는 영국산 영화들 내에서만 종종 볼 수 있을 뿐 해외 관객들까지 만나기는 쉽지 않다. 관객의 환상을 자극하기보다 현실적이라 전세계적으로 먹힐 만한 셀링 포인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셜록 홈즈>는 의외로 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공략한다. 감독이 영국 출신인 가이 리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할리우드의 메이저 제작사가 만들고 메이저 제작자(조엘 실버)가 참여한 작품이고, 주인공인 셜록 홈즈 역에 다른 영국 배우들 대신 미국 배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존에 알고 있던 '셜록 홈즈' 추리물의 겨울 대목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버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의외로 영국적인 느낌을 영화 내내 고스란히 안고 간다. 그것도 신비로운 판타지나 낭만적인 로맨스가 아닌, 어딘가 무뚝뚝하고 거친 듯하면서 아기자기한 영국 본연의 이미지를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성수기용 대작이지만, 영국식 재미가 꽤 알차게 담겨 있는 영화다.
풍부한 배경지식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호기심, 단 몇 초의 순간만에 펼쳐지는 놀라운 판단력을 무기로 사립탐정계에서 이름 좀 날리고 있는 셜록 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러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애가 워낙 심하고,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말썽도 수없이 피우는 사람이다. 이런 그를 동료인 의사 존 왓슨(주드 로)이 매번 뒷수습을 하며 보살핀다(?). 그러던 어느날 런던을 공포에 떨게 하는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니, 그 주범은 비밀 종교 집단 소속의 블랙우드 경(마크 스트롱)이다. 그가 여섯번째 희생자가 되려는 여인을 앞에 놓고 기괴한 의식을 치르는 순간, 홈즈와 왓슨은 노련한 콤비 플레이로 가까스로 여인을 구출하고 블랙우드를 체포한다. 이후 블랙우드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일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야욕에 불타는 블랙우드는 사형 집행 뒤 자신이 부활해서 3명을 더 죽일 것이라고 한다. 처음엔 콧방귀를 뀌었던 홈즈.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블랙우드에게 사형이 집행된 이후에 또 다시 블랙우드에 의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언제나 논리정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추리에 임했던 홈즈지만, 이번에는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홈즈와 왓슨은 이 위험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하기로 하고, 여기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범죄자의 기질이 다분한, 홈즈와 애증 관계에 있는 여인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애덤스)가 가세한다.
직접 영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희한하게 이 영화를 통해서 영국적 분위기와 캐릭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꼬장꼬장한 영국식 캐릭터의 향연'이다. 속도감 넘치고 가차 없는 전개로 유명한 가이 리치가 만들어낸, 언뜻 보기에 변형된 히어로물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 미국적인 느끼함과 과장 대신에 혀 굴림 쫙 뺀 영국인의 말투에서 느낄 수 있는 무뚝뚝하고 담백한 느낌이 가득하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요즘이 전성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미국 출신임에도 이 영화에서 영국식 억양을 훌륭히 구사하며 내심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셜록 홈즈의 이미지를 멋있게 구현해 낸다. 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방에 틀어 박혀 폐인이 될 만큼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캐릭터는, 스트레스를 사설 권투를 통해 풀 만큼 터프하면서도 사건을 해결할 때는 웬만해선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을 만큼 젠틀한 구석도 있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라는 얘기다. 이런 입체적인 인물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알찬 연기에 힘입어 뻔한 구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탄생했다. 일각에서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와 이미지가 겹치는 것 같다고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셜록 홈즈는 물론 똑같이 문제아같긴 해도 미국식 느끼함이 묻어나는 토니 스타크와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는 담백하고 똑 부러지는 인물이라 할 만하다.
홈즈와 함께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왓슨 역의 주드 로 역시 볼만하다. 흔히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왓슨이라 하면 홈즈의 조수 역할에 가까웠는데 여기서는 홈즈가 없으면 매우 서러워 할 동등한 동료의 신분이다. 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훤칠해서 왓슨은 홈즈를 보조하는 캐릭터가 아닌 투톱 캐릭터서 당당하게 기능한다. 주드 로는 왓슨이 갖고 있는 상반된 이미지 - 확실한 결단력과 군인 출신의 수려한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남성미와 만날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 홈즈를 뒷바라지하는 '현모양처' 이미지를 적절히 조화시켜 세련되면서도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가 주는 재미 중 상당 부분은 이처럼 홈즈와 왓슨의 캐릭터가 부딪치고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빚어내는 미묘한 웃음과 감정 라인에 있다. 홈즈의 여인인 아이린 애들러 역으로 등장하는 레이첼 맥애덤스는 마치 범죄물의 필수 요소인 팜므 파탈과 같은 매력을 이 영화에서 한껏 뽐낸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미국인 캐릭터 중 한 명인 그녀는 거기에 걸맞게 쿨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지만, 아쉽게도 레이첼 맥애덤스의 연기력과는 별개로 그녀의 매력이 앞서 이야기한 두 남자만큼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악역 블랙우드 경을 연기하는 영국 출신의 배우 마크 스트롱은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강렬한 표정과 절제된 감정 연기로 상당히 카리스마 있게 펼쳐 보인다. 볼드모트를 연상시키는 악마적 카리스마가 인상적이나, 결말부에 이르러 그 카리스마가 순식간에 수그러드는 점이 아쉬웠다.
바로 전 주에 <아바타>가 개봉하면서 대다수 관객들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시각을 한 차례 들었다 놨다 한 이 시점에서, <셜록 홈즈>는 얼핏 보면 꽤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성수기에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가장 큰 것이 볼거리인데,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빵빵 터지는 강력한 볼거리를 보여주진 않는다. (물론 중반부에 등장하는 부두 결투 장면이나 대규모 폭발 장면, 후반부의 타워 브릿지 결투 장면등 몇몇 힘 있는 볼거리는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설적 추리 소설 캐릭터인 '셜록 홈즈'를 원작으로 했다고 해서 무릎을 칠 만큼 놀라운 스릴러 구조나 빼어난 반전으로 가득한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미처 기대치 못했던 다른 곳에 승부수를 던졌고, 그 결과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의 블루오션을 갖고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할리우드 영화에서 쉽게 느끼지 못하는 영국 본연의 분위기와 캐릭터의 향연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으레 볼 법한 이야기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의 장엄한 활약이나 낭만적인 로맨스를 번쩍거리는 화려한 영상으로 경배하듯이 비추지도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부수고 폭발시키며 폭죽놀이하듯 스크린을 수놓지도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파괴적이고 강렬하고 선굵은 재미를 기대한다면 <셜록 홈즈>를 선택하는 것이 후회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대신 이 영화에는 영국에서 이미 자신만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힌 영국 감독이 만들어낸, 화려하고 굵직굵직하진 않지만 깨알같이 꽉 들어찬 재미가 있다. 가이 리치 감독은 이 영화를 화려하고 거대하진 않지만 관객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만한 흥미로운 효과를 영화를 채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속 디지털 카메라 '팬텀'의 활용이다. 불과 몇 초동안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돌아가는 홈즈의 사고력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영화는 팬텀을 활용한 고속 촬영으로 수 초의 순간을 몇 배로 늘려 보여준다. 마치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자의 재능을 보는 듯, 기묘하게 미끄러지는 이 효과 속에서 홈즈의 추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촬영 기법까지 새로운 것을 동원할 만큼 홈즈의 추리는 역시나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를 여느 스릴러물 보듯 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무었일까 적극적으로 추리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꽤 당황스러울 수 있다. 영화는 그 단서를 별로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홈즈의 눈에만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단서로 보일 뿐.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홈즈를 앞질러 추리하려 하기보다는, 사건을 풀어낸 뒤 홈즈가 뒤에 덧붙이는 설명을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감탄하며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이것은 이 영화가 본격 추리물을 표방한다기보다, 노이로제에 가깝다고 할 만큼 완벽을 기하는 홈즈의 캐릭터를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캐릭터 영화임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웅장하지는 않더라도 사실적으로 구현된 19세기 런던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들어 있다. 이 영화는 사건이 시종일관 런던 바깥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런던 곳곳을 누비며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런던의 호화로운 상류층 세계에서부터 구역질 날 것 같은 외진 환경까지 세심하게 훑고 있다. 더구나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런던의 대표적 명물이 된 타워 브릿지를 보는 재미가 크다.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는 이 타워 브릿지가 뒷배경이 아닌 중요한 결투 장소가 되기도 하는데, 유려하게 위아래로 훑는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는 타워 브릿지의 웅장함이 상당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앞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영국 특유의 캐릭터가 갈등하고 화합하는 순간순간들이다. 특히 홈즈와 왓슨의 구도가 인상적이다. 이들은 오랜 콤비 플레이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지만, 그만큼 애증이 깊다. 홈즈는 자신을 두고 결혼이라는 개인적인 길을 택하려는 왓슨이 말은 않지만 못내 야속하고, 왓슨은 언제나 말썽 피우며 자신을 난처하게 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혼삿길마저 막으려고 하는 홈즈가 얄밉다. 하지만 상반된 성격임에도 영국 신사 특유의 절제된 태도가 어느 정도 몸에 밴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쌓인 감정을 대놓고 폭발시키지는 않는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애틋할 정도의 우정을 갖고 있는 홈즈와 왓슨이 사건 해결의 과정에서 반목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쭉 이어지고, 굳이 사건만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이러한 관계 진전 양상을 따라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따박따박 따지듯이, 쏘아붙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점잖은 것 같기도 한 그들의 말투와 행동은 굳이 웃기려 하지 않는데도 웃기고, 굳이 표현하려 하지 않는데도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괴팍하고 무뚝뚝한 태도와 은근한 배려와 애정을 함께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영국인들의 담백한 모습을 가이 리치 감독은 홈즈와 왓슨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방식처럼 부담스럽지 않고 쿨하게 표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원작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셜록 홈즈>는 <해리 포터>나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원작 소설의 큰 인기를 등에 업고 출발한 프랜차이즈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오히려 셜록 홈즈가 갖고 있었을 법한 본연의 성격을 능숙하게 끌어와 영국적 캐릭터와 유머감각으로 무장해 원작 뿐 아니라 영국 전반의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게 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가이 리치 감독은 투닥투닥거리듯 은근히 서로 아끼는 인물들과 본인이 즐겨 만들었던 범죄물 특유의 스피디하고 깔끔한 전개를 통해 이 영화를 거대하진 않아도 깨알같은 재미가 있는 영국 스타일의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이 영화의 특색은, 올 겨울 나올 숱한 대작들 사이에서 전혀 꿀리지 않을 만한 뚜렷한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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