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가지고 노는 타란티노...★★★★
유대인 출신 미군 중위인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은 복수심에 불타는 유대인 장병들로 ‘개떼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나치에 대한 무조건적 살육을 자행한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독일군 사이에 공포를 불어 넣는 것. 독일군의 영웅을 그린 영화 시사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개떼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극장을 폭파시켜 나치의 우두머리들을 한꺼번에 죽인다는 계획을 세운다. 한편,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에게 일가족이 몰살된 쇼산나(멜라니 로랑)는 나치가 자신의 극장에서 시사회를 열게 되자 극장을 불태워 나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이렇듯 히틀러 등 나치 우두머리를 제거하기 위해 별개로 세워지고 진행된 두 계획은 시사회 당일 극장에서 만나게 된다.
아무리 덩치가 큰 수사자도 쉽게 대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있다. 바로 하이에나. 이유는 단 하나. 떼로 몰려다니고, 떼로 덤비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유일하게 사자의 라이벌이 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영화 속 조직인 ‘개떼들’도 이유 불문하고 마구 물어뜯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독일군 사이에 공포를 불어 넣기 위해 벌이는 잔인한 살육은 타란티노가 처음으로(?) 생각해 낸 건 아니다. 가깝게는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가 9년 만에 물러선 소련군의 경험도 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들은 저녁에 몰래 소련군의 주둔지에 들어가 잠자는 소련군의 목을 따서는 아침에 산 위에서 소련군 진지로 날렸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 보이는 목 없는 시체들, 그리고 머리 위로 날아드는 동료들의 머리는 소련군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사병 사이를 파고든 공포는 우수한 무기와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에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타란티노 영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잔인한 장면이 이 영화에서도 근근히(?) 등장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는 타란티노의 취향이며, 잔인한 장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사람은 일단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경고의 의미다.(옆자리의 여성은 처음 잔인한 장면-머리 가죽을 벗기는-이 나온 이후로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하고 회피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당연하게도 타란티노의 인장이 강하게 찍혀 있는 영화다. 우선 무수하게 날리는 화려한 대사빨은 얼핏 <저수지의 개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오고가는 수많은 말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유머는 혹시 중요한 대사를 놓치게 될까봐 잠시라도 화면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한다. 몇 번의 총격전을 제외한다면 <바스터즈>의 모든 것은 거의 수다에 가까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영화라면 총과 칼이 있어야 할 상황을 말이 대신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말만으로 묘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제공한다는 것, 이는 쉽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특히 여러 언어의 특성을 살린 코미디 장면은 말 그대로 대박이다.
두 번째, <바스터즈>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관객의 예상을 끊임없이 배신하고 다른 방향으로 내닫는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가지로 뻗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영화 속 이야기가 자체 동력을 가지고 자기 발길 닫는 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무정형의, 정신없고, 혼란하고, 중심이 없다는 식의 비판이 가해질 이런 식의 가지 뻗기가 뒤로 가면서 절묘하게 봉합되고 정리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물이 소개될 때마다 오래 전 영화를 연상시키듯 튀어나오는 큰 자막과 빠르게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플래시백 활용은 거의 신묘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한 편의 영화가 장르적 관습 70~80%, 참신함 20~30% 정도의 비율일 때 대중적으로 흥행을 올리기에 적당한 것 같다. 그런데 타란티노는 정반대의 비율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엔 언제나 찬반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한다.
세 번째로 타란티노의 영화에선 음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바스터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엔니오 모리꼬네, 데이비드 보위 등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급격한 긴장의 고조와 절벽으로 떨어지듯 해소되는 과정은 허무잔혹개그를 보는 듯하고, B급 영화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과시하는 듯도 싶다.
한편 <바스터즈>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빼 놓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타란티노의 대사빨이 통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대사를 소화할 연기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찰슨 브론슨을 흉내 낸 것인지, 아니면 말론 브란도를 흉내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브래드 피트의 연기는 주연배우로서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출연 분량이 짧기는 하지만, 똘똘해 보이는 독일 출신의 다이앤 크루거라든가 프랑스 여배우 멜라니 로랑의 연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단 한 명의 배우를 꼽자면 그건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미 깐느에서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력이 말해주듯 말 그대로 영화에서 훨훨 날아다닌다. 무기로 위협하지도 않고 말만 가지고 유대인을 숨겨준 프랑스 농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 결국 털어놓게 만드는 첫 장면에서부터 그의 연기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마지막으로 타란티노는 대체 왜 나치, 히틀러를 선택했을까? 분명 <바스터즈>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대체역사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현물도 아니다. 타란티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엄청난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다. 누구나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늘어놓는 저 허풍을 보면 그는 단지 영화와, 역사와 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다. 어쩌면 타란티노에게는 마구 잡이로 죽여도 욕먹지 않을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물론 좀비를 등장시킨다면 무차별적 학살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를 상대로 한 살육은 굳이 그가 하지 않더라도 이미 타란티노의 절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인장 아니던가. 아마도 타란티노는 히틀러와 나치라면 마구 죽인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물론 모든 독일군이 나치의 충복은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 <바스터즈>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발키리>와는 정반대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타란티노라든가 로버트 로드리게즈, 거기에 에드가 라이트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 정말 즐기면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거기에 더해 좀 짜증나는 건 자기 만들고 싶은 영화를 즐기면서 만드는 타란티노가 아무리 봐도 천재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