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불신과 극단의 믿음...★★★☆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다. 이 말과 함께 한국 개신교가 내게 드리워진 이미지는 ‘편협’ ‘배려 없음’ ‘편 나누기’ 등으로 대표되는,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물론 교회 나가는 친한 친구들도 있고, 가족들도 대다수가 교회에 나가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 개신교의 부정적 문화는 개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엔 이미 그 한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다.(많은 기독교인들이 한국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을 접하면 대체로 ‘그건 일부분이다’라는 식으로 피해간다) 간디가 그랬다든가? “예수는 존경하지만, 기독교인은 싫다”
아무튼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일종의 협박이자 강요다. 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가 전도를 하기 위해 협박과 강요를 활용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신이 그렇게 간단한 논리와 기준으로 사람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 것 같지도 않다. 최소한 내 주위만 봐도 지옥에 가야 마땅할 기독교인과 천국에 가야만 할 비기독교인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불신지옥>은 제목이 주는 예상과는 달리 한국 기독교 문화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영화도 아니고, 특히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제거하며 나가는 결론 부분은 도덕적 경구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긴 해도 한국 공포 영화에 대한 불신이 깊은 상황에서 선보이는 <불신지옥>은 현대 우리 사회가 발 딛고 선 현실을 기반으로 한 공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두드러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혼자 살며 학교 다니랴, 아르바이트 하랴 정신없이 살고 있던 희진(남상미)은 동생 소진(심은경)이 실종됐다는 엄마(김보연)의 전화를 받고 집(아마도 서울 인근의 소도시)으로 내려간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광적으로 기독교에 빠진 엄마는 기도를 하면 소진이 돌아올 것이라며 경찰 신고를 말리지만, 엄마가 없는 틈에 희진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다. 불치병에 걸린 딸 때문에 고통 받는 형사 태환(류승룡)은 소진의 실종이 단순 가출이라고 믿으며 대충 수사를 진행하지만, 투신자살한 이웃 정미(오지은)의 집에서 소진에게 남긴 유서가 발견되고, 아파트 주민들이 소진이 신들린 아이라는 증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이 영화가 주는 공포 장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실적 공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현실적 공포다. 현실적 공포를 살펴보면, 우선 복도식 아파트, 그 자체가 공포다. 복도식 아파트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한 밤중, 그 긴 복도가 어떤 시각적, 공감각적 이미지를 주는지. 특히 복도식 아파트에 접해 있는 방은 묘한 호기심과 공포를 전달하는 효과적 매개체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은 묘한 관음증적 호기심이 동하고, 방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노출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깃든다. <불신지옥>에서도 몇 차례에 걸쳐 복도 방을 이용해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까지 가면서 지나가야 하는 현관들의 존재와 복도와 계단에 쌓인 물건들도 공포를 자아내는 소품으로 잘 활용된다. 계단에서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이어지다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벌이는 추격전은 가히 이 영화의 백미라 할만하다.
비현실적 공포는 주로 이웃집 주민들과 경비 아저씨의 죽음과 관련해 드러난다. 특히 베란다에 있던 희진의 눈앞에서 이웃집 주민인 정미(오지은)가 죽는 장면은 아마도 한국 공포 영화 중 목매달아 죽는 장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장면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니면 그 어떤 미스테리한 힘의 작용인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죽기 전에 ‘소진을 봤다’는 얘기를 한다. 그런데 영화는 소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뜻 실루엣 등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모호하게 비추며 넘어간다. 난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실종된 또는 죽은 소진의 모습을 드러내어 활용하는 건 공포를 자아내는 매우 손쉬운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한국 공포 영화가 귀신-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다코의 혼령을 등장시켜 깜짝 효과를 자아냈는가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사다코의 혼령이 등장하면 할수록 한국 공포영화에 대한 애정지수는 떨어져만 갔다. 어쨌거나 그만큼 이용주 감독은 쉬운 접근법을 포기했다는 것만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현실적 공포와 비현실적 공포로 나뉘는 <불신지옥>은 전체적으론 현실에 기반한 공포라는 점에서 돌이켜보면 더욱 스산해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불신지옥>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사실은 동일한 것임에 주목한다. 그러니깐 기독교의 신에 대한 광신이나 우리의 무속 신앙에서 보이는 광신이 결국 같다는 것이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접신의 흔적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림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무언가에 대한 맹신과 무언가에 대한 불신이 모두 공포가 되는 이상한 사회인 셈이다.
<불신지옥>이 전체적으로 스산하고 몇 몇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공포영화로서 강력한 한 방은 끝내 터지질 않는다. 오히려 공포영화로서보다는 오컬트 영화로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결말부로 가서 광신도인 어머니를 일반적(?)인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모정으로 감싸 안는 모습을 보이는 건 현실과의 타협인 것 같아 못내 아쉽다.
※ 솔직히 영화 평론가들이 처음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을 때, 난 그것이 고 정승혜 대표의 유작이기 때문에 평이 좋은 쪽으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여전히 들면서도 그럼에도 오랜만에 접하는 볼만한 한국 공포 영화인 것도 분명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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