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가 나를 놀라게 한 건 한 두 번이 아니다. 3D 애니메이션은 마냥 컴퓨터로만 제작하는 줄 알았던 나에게 픽사는 자신들의 작품의 9할은 아날로그적인 치밀함과 풍부한 감성임을 일깨웠고(특히 작년 국내에서 열린 픽사 전시회에서 선보인 여러 작품들의 스케치는 현실 그 자체에 매우 근접한 세심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술적 진보만 추구해도 모자랄 마당에 픽사는 스토리 면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깊이까지 보여줬으며, 매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이건 정말 지금까지 나온 픽사의 작품 중 최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으면서 그 뒤에 이에 뒤지지 않거나 이를 넘어서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것도 3~4년에 한 번 씩도 매년 말이다. 도대체 이 회사의 근무환경이 어떻길래 이렇게 제작진들이 매번 창조적인 결과물들을 내놓는가 싶을 정도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진보적 측면에서 이제 숱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 중에서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2007년에 <라따뚜이>를 보고 '최고작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2008년에 <월.E>가 나왔고, '<월.E>가 최고작이구나' 하는 와중에 올해 <업>이 등장하고 말았다. 이제 매번 단순히 '상업성 높은 블럭버스터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오락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곳이 된 픽사에서 이번에 내세운 이야기는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노인과 새파랗게 어린 소년의 모험이다. <라따뚜이>에서 시궁창 쥐를 요리사의 반열에 올리고, <월.E>에선 폐허가 된 지구를 수년동안 혼자 살아온 로봇을 절절한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픽사는 이번에도 뭔가 쉽게 상상되지 않는 조합으로 모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아니나다를까, 이 모험은 지금껏 봐 온 어떤 어드벤처 영화에도 없었던 깊이와 아련한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기 탐험과 찰스 먼츠(크리스토퍼 플러머)의 활약상을 보며 자신도 탐험가가 되리라 꿈꾸었던 칼 프레드릭슨(에드워드 애스너, 이순재). 함께 모험의 꿈을 꾸었던 아내 엘리를 먼저 떠나보내고 칼은 자식도 없이 홀로 수십년 간 엘리와 함께 살았던 집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도시화를 위해 철거되면서 칼의 집 또한 위기에 처하고, 칼은 이제 때가 됐다고 느낀 듯 이 곳을 떠날 채비를 한다. 집과 함께. 칼은 집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풍선을 매달아 공중에 띄우고 이 집과 함께 젊은 시절 엘리와 함께 꿈꾸었던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여기에 끼어든 불청객이 있었으니, 바로 열혈 보이스카웃 소년 러셀(조던 나가이). 보이스카웃이 인정하는 봉사 배지를 받기 위해 칼의 집에 계속 얼쩡거리다 함께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러셀을 받아들인 칼. 졸지에 몇 세대를 뛰어넘는 모험 친구가 된 두 사람은 남미의 숲 한 가운데에서 그동안 생각도 못했던 인생 최고의 모험을 겪게 된다.
나는 이 영화는 3D 더빙판으로 봤다. (현재 3D 자막판으로 상영하는 극장은 없다) 평소 때라면 애니메이션을 볼 때 웬만해선 더빙판은 보지 않는데(유명 연예인이 더빙을 해도 그렇다), 이 영화만은 예외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나라에 개봉된 숱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중 더빙판의 퀄리티가 자막판의 퀄리티와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된 첫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된 이유 중 과반수 이상은 이순재 씨의 목소리 연기 참여에 있다. 보통 유명 연예인이 목소리 연기를 하면 성우만큼의 능수능란한 연기가 좀 부족하고 배역의 색깔보다 그 연예인의 색깔이 더 눈에 띄어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업>은 예외다. 이순재 씨가 그동안 보여준 많은 캐릭터와 영화 속 칼 프레드릭슨의 캐릭터가 상당부분 유사해 보이기 때문에 이질감이 한결 덜 하다. 이 뿐 아니라 이순재 씨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목소리 연기는 여느 연예인들의 어설픔을 한참 뛰어넘는다. 괴팍하고 까칠해 보이는 말투 속에 행복과 슬픔, 다정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담겨 있으며 때론 별 말이 없어도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만으로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당신이 말한 그 곳으로 가는 중이야, 여보.'라는 대사가 이순재 씨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될 때의 그 저릿함이란. 이순재 씨가 이 영화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게 된 건 역대 애니메이션 속 목소리 연기 중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함께 호흡을 맞추는 러셀 역의 아역(으로 들린다) 목소리 연기자 또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연기를 펼쳐 웃음을 자아낸다.
최근작에서 픽사는 작품마다 실사 뺨치는 극단적 사실성에 매달리기보다 여러 색깔과 빛과 질감이 어우러진 미적 측면에 신경을 써왔다. <라따뚜이>의 파리 풍경과 요리에서 그런 부분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월.E>에선 광활한 우주 뿐 아니라 폐허가 된 지구의 모습에서도 어떤 우아함이 느껴졌다. 이러한 시각적 아름다움은 <업>에서 거의 절정에 달한 듯 싶다. 지금까지 나온 픽사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이라 할 만한 5분여 간의 오프닝은 다소 빛바랜 색감과 파스텔톤의 색채가 어우러져 이보다 더 우아할 수 없는 영상을 만들어내고, 영화 내내 색색가지 풍선을 매단 집이 남미의 숲과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보는 사람들도 기분을 붕붕 뜨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푸근하고 달콤하다. 칼이나 러셀 등 캐릭터들의 모습은 지극히 사실적이라기보다 RPG 게임 같은 곳에 흔히 나올 법한 2등신 캐릭터로 단순화시킴으로써 발랄함은 살림과 동시에 사실적인 표정이나 몸짓으로 캐릭터들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칼은 주름으로 가려진 얼굴과 쉽게 움직이지 않는 얼굴근육으로 과묵하지만 사려깊은 성격을 표현하고 러설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얼굴근육과 과장된 몸짓으로 아직 덜 성숙한 소년의 천진함을 표현한다). 이처럼 픽사는 영화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최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캐릭터와 미장센의 특징은 매 작품마다 특색있게 변주함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매력을 얹어주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리얼리티가 필요한 부분과 굳이 필요없는 부분을 정확히 가려낼 줄 아는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픽사 작품 사상 최초로 3D로도 관람 가능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는데 그 완성도 또한 뛰어나다. 영화 전편 내내 계속되는 3D로서의 사실적인 원근감과 입체감은 하늘 속을 유유히 나는 집의 모습에 관객 또한 사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질감 또한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며, 숲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모험에서는 스릴도 배가시켜주는 역할을 제공한다. 흔히 3D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화면 겹침 현상과 같은 기술 상 오류를 이 영화는 픽사 특유의 노련함 덕분에 반복하지 않는다. 이렇게 3D로 사실성이 더해진 영상에 주인공들 이외에도 말하는 개, 도요새 등 웃음을 절로 일으키는 유머 캐릭터들의 활약에 힘입어 영화는 어드벤처 영화 자체로서의 기능 또한 뛰어나게 수행한다.
그러나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기술적 세련됨이나 오락성은 더 이상 중요한 언급 대상이 되지 못한다. 어느새 픽사의 작품에는 눈으로 보이는 오락성을 가뿐히 넘어서는 보석같은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픽사는 그러한 보석같은 이야기를 범상치 않은 주인공 캐릭터로부터 출발시킨다. 그동안 장난감, 몬스터, 물고기, 수퍼히어로, 자동차, 생쥐, 로봇 등 지극히 만화적이고 때론 비주류적인 소재를 가져다 모두가 탄복할 만한 깊은 진심을 전달해 왔는데, 이는 <업>에 이르러 더욱 빛을 발한다. 웬만한 프로 애니메이터들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까칠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기'를 픽사는 이게 뭐 별 일이냐는 듯 과감히 해낸다. 거기에 이 한 명으로도 모자라 영웅적 구석이라곤 좀체 보이지 않는 실전은 0점인 어설픈 열혈 모험애호가 소년까지 모험 친구로 집어넣는다. 프로페셔널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실은 인간적인 매력으로 가득한 이 주인공들을 통해 픽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한없이 이어지는 삶과 꿈에 관한 것이다.
칼의 모험은 사별한 아내 엘리와 함께 꿈꾸었던 소망에서 출발한다. 꼭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로 모험을 떠나보자던 부부는 서로를 애정으로 보듬으며 그 꿈을 위해 조금씩 노력하지만 어느새 모험을 향한 꿈은 당장 먹고 살아야 할 현실에 우선순위를 넘겨주고 만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동화같은 모험은 힘들어졌다 할 지라도 비행기 티켓 끊고 여행 삼아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이제 좀 먹고 살 만 하니까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함께 늙어가는 것만으로 행복했지만 결국 함께 가길 꿈꾸었던 그 곳을 향한 희망은 가슴 한 켠에 접어둔 채 칼은 아내를 보내야 했다. 영화는 초반 5분동안 이러한 칼의 지난 삶을 너무나 낭만적인 무성영화처럼 보여주며 애잔한 낭만과 고단한 현실이 계속 부딪쳐야만 했던 안타까움을 담아낸다. 결국 이 할아버지가 갑자기 여행을 결심하게 된 건 막말로 나이가 들어서 늦바람이 난 것이 아니라, 지난 시절 접어 둬야 했던 꿈을 생의 황혼기에 다시금 접어 보면서 내딛게 된 여정인 것이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 꿈처럼 여기며 이루지 못했던 그 모험을, 칼은 아내를 보내고 노인이 되어서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직 제대로 된 모험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년이 끼어들면서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러셀은 보이스카웃으로 성과를 인정받은 수많은 봉사 배지를 자랑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캠핑 한 번 해보지 못한(집에서 해본 게 다인) 아이다. 모험에 대한 환상 가득할 뿐 진짜 집 바깥으로 나가서 제대로 된 모험은 해본 적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만 보냈다는 얘기다. 아직 제대로 삶을 겪어보지 못한 소년과 이제 삶을 거의 다 겪고 새삼 모험에 발을 들인 노인의 모험은, 이들이 꿈꾸었던 것과 앞으로 꿈꿀 것이 절묘한 연결고리를 일으키면서 기대 이상의 효과를 일으킨다. 모험을 끝내려 했던 이는 이제 이것이 시작임을 깨닫고, 진짜 모험엔 겁을 냈던 이는 진짜 모험에 용감하게 뛰어든다.
아내와 함께 이야기했던 그 폭포로의 모험이 인생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살아왔던 칼은 막상 나이가 들어 홀로 그렇게 바랐던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실은 지금껏 수십년을 살아온 순간 하나하나가 모험이었음을. 아내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고, 집을 짓고 꾸미고, 새 차도 샀던 그 아련했던 추억의 순간순간이 실은 칼이 거쳐왔던 많은 모험들 중의 일부였다는 걸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상상 속의 모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면서 '이게 진정 내가 원했던 삶일까?'하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미처 이렇게 될 줄 몰랐기에 더더욱 흥미로운 모험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모든 순간이 모험이듯이, 내가 어렸을 때 꿈꿨던 그 이상을 이룬다고 내 삶의 모험이 모두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칼은 나이를 먹고 흰머리가 성성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삶이 끝나지 않는 한 모험도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삶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끈질긴 모험의 맛에 대한 칼의 깨달음은 이내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 러셀에게로 연결된다. 아는 게 없으면 용감하다고, 아직 삶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어쩌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에 용기 있게 맞설 수 있는 걸지도 모를 러셀의 태도에 칼은 처음엔 귀찮게 여기다가도 이내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칼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현실의 벽 앞에 찬란했던 모험의 꿈을 접었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러셀에게서 앞뒤 재지 않고 모험에 아낌없이 뛰어드는, 자신도 어린 날에 가졌었던 그 대담한 용기를 다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꿈만 꿔 왔던 자신과는 달리 러셀은 그 어린 나이에 직접 다 경험하니 아마도 자신보다는 더 용감한 삶을 살 것이라고 칼은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나이가 들어서까지 칼에게 그 큰 힘을 주었던 '모험의 정신'은 러셀이 함께 하면서 변치 않고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나이를 먹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 안에 있는 정신, 삶을 모험처럼 알고 용감하게 뛰어드는 정신은 변하지 않고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업>은 어드벤처 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어쩌면 인생에 대한 드라마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업>이 이야기하기를 인생 자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칼이 지나온 삶을 통해 때론 모험을 향한 꿈을 꾸지 못할 만큼 삶이 팍팍할 때도 있을 것임을 암시하지만, 영화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비록 지금이 당신이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더라도, 오히려 상상과 다르기에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아니겠느냐고 따뜻하게 다독인다. 매 순간 순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중요한 업적을 이루고 큰 목표를 달성하는 우리 각자가 멋진 모험가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이라는 이름의 모험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넌지시 얘기한다. 한없이 훨훨 날아오르는 풍선 매단 집처럼 두근거리는 즐거움과 뭉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모험을 선사하는 이 영화 <업>은, 인생에 관한 가장 멋진 비유가 담긴 영화다.
+ 본 영화 전에 상영되는 한인 2세 피터 손 감독의 단편 <구름 조금>도 놓치면 후회한다. <업>을 보며 느끼게 될 사랑스러움을 사전에 자극하기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