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빈틈없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접하는 이가 '빈틈없구나'라는 생각조차 느끼게 하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빈틈없다는 느낌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오히려 벅찬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 마치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아귀가 딱딱 들어맞되 너무 압박적일 정도로 극적이진 않을 때. 보고 있을 때는 몰라도 보고 난 뒤에 비로소 '아, 참 빈틈이 없었구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빈틈없는 면모를 맘껏 과시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경지는 그런 티를 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그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그 리얼리티란 보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하되, 다큐멘터리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그리듯이 앞뒤 이치 상 말이 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사건의 연속을 슬그머니 펼쳐놓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은 때로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극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기도 하는데, 그의 대표작인 <아무도 모른다>가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 <걸어도 걸어도> 역시 그런 미덕이 고스란히, 어쩌면 더 능청스럽게 잘 살아난 작품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저릿해진다.
좀처럼 모이기 힘든 요코야마 가족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인 것.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와 어머니(키키 키린), 이제는 실질적인 장남이 된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 전 남편과 사별한 료타의 아내 유카리(나츠카와 유이)와 아들 아츠시, 료타의 누나이자 장녀 지나미(유)와 넉살좋은 그녀의 남편과 세 아이들,까지. 모처럼 모였지만 이상하게 그들 사이는 유독 서먹해 보인다. 어렸을 땐 그렇게 의사인 아버지를 동경했건만 지금은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진 료타, 애 딸린 과부라면서 며느리가 영 마뜩찮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료타만 챙겨주는 시어머니가 영 서운한 유카리, 어머니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데 다짜고짜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겠다는 지나미 가족까지. 각자의 문제로 어딘지 어긋나 있는 이 가족들은 함께 하는 1박 2일 간, 15년 전 가장 소중했던 이를 잃었던 기억을 뒤로 서로 간에 감춰져 있던 아픈 진심을 조용히 그러나 아리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감독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극영화 감독이고, 출연한 배우들도 모두 일본 내에서 연기파로 손꼽히는 쟁쟁한 배우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흡사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한다. 이건 과거의 아픈 상처를 지닌 가족들이 펼치는 극단적인 감정의 충돌이라기보다,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평범한 가족의 하루를 '인간극장' 스타일로 조용히 조명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만큼 영화는 절대 감정이나 대사의 과잉으로 치닫지 않고, 그렇다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여백을 많이 두지도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딱 거기에 맞게 '생활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곧잘 볼 수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사실 속내에는 누구보다 깊은 아픔을 갖고 있는 어머니 역의 키키 키린이 보여주는 연기는 그 중에서도 가히 명품이라 할 만하다. 그 어떤 과장이나 강조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그녀의 대사나 어투 하나하나에서 은연중에 품고 있는 세밀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내와 자식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약점을 드러내기도 하는 고지식한 아버지 역의 하라다 요시오 역시 내면에 많은 걱정과 불안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려 하진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쓸쓸하게 표현한다. 이 영화에 나온 배우들 중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졌을 료타 역의 아베 히로시는 기존의 카리스마 이미지를 한꺼풀 벗고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불만많아 곧잘 틱틱대는 아들의 모습을 부담없이 잘 표현했다. 여기에 상냥한 성격이지만 실은 며느리 입장에서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부모님들이 야속해 속앓이를 하는 유카리 역을 섬세하게 표현한 나츠카와 유이, <아무도 모른다>에선 아이들을 버리는 '비호감' 부모였지만 여기서는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는 큰딸 지나미 역의 유(YOU)까지, 연기파 배우들이 연기하는 티 내지 않고 보여주는 진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극적으로 치닫기 충분한 소재들을 의외로 조용하게 요리하는 데 능한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 역시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의 모습을 결코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비정하게 느껴질 만큼 담담하게 쫓아갔었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다른 상처를 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서 그리면서 그러한 스타일은 좀 더 섬세해지고 더 깊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두드러진 극적 긴장감 속에 하고자 하는 얘기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물흐르듯 지나가는 일상의 물결 속에 한땀 한땀 세밀하게 감정을 새겨넣을 줄 아는 감독은 어떻게 보면 1박 2일간 전개되는 가족들의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도(그 사이에 어떤 갈등이 급작스레 폭발해서 가족 구성원이 와해된다든가 하는 사건조차도 없다.) 그 시간 안에 서로 부대끼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감정을 섬세하게 새겨넣음으로써 지켜보는 관객들도 오만감정이 다 들게끔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적지 않은 구성원들에 걸맞게 이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이들도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모두가 그런 어긋난 부분을 품고 있기에 이 가족이 그렇게 멀쩡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의사인 아버지는 일에만 너무 몰두했던 나머지 가족들과 유독 소원하다. 인자한 어머니마저도 지난 시절 다른 여인을 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 잊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쓰라린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들 료타는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의사인 아버지를 동경했건만 지금은 아버지와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못견뎌 한다. 며느리 유카리는 '애 딸린 과부'라는 시부모들의 시선도 영 불편하고 겉으론 상냥한 듯 하면서도 확실히 내외하는 티를 내는 시어머니도 야속하다.(그녀는 '법적으로' 이제 며느리가 된 유카리를 아직도 '유카리 씨'라고 부르고 손자가 된 아츠시도 '아츠시 군'이라고 부른다. 꼭 남처럼.) 딸 지나미는 어머니 앞에서 들으라는 의미로 아이들한테 '할머니 계시니까 참 좋다, 그치?' 하며 들어와 살 뜻을 거듭 밝히지만 정작 어머니는 겉으론 이를 어물쩡 넘기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게다가 15년 전 자기 목숨 대신 구하고 간 소년 요시오까지 방문하면서 이들의 갈등은 조용히 더 깊어져 간다. 영화는 대놓고 소리 바락바락 지르면서 싸우는 풍경을 조명하며 갈등을 부각시키는 대신, 습관처럼 몸에 배어 버린 행동이나 별 강조 없이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들을 통해 보여준다. 15년 전의 큰 사고가 그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래시백 한 번 사용하지 않고 현재의 1박 2일에 충실하지만, 관객들은 별안간의 갑작스런 폭발이 아니라 15년 여에 걸친 세월을 지나면서 어쩔 수 없는 버릇처럼 묵직한 무게를 지니게 된 그들의 추억 어린 말과 표정, 행동을 통해 그동안 쌓여온 스산한 감정의 앙금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슬그머니 내보이는 앙금은 그래서 더 사무치게 느껴진다. 정색하고 상대방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하는 것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실실 웃으면서 상대방의 뒤통수를 때릴 때가 더 비정하게 느껴지듯이, 격렬하게 분노하고 울부짖으면서 표현하기보다 한두번 겪은 일이냐는 듯 무심하게 던지는 표정과 말은 그 무감함때문에 보는 이의 가슴을 더 콕콕 찌른다. 특히나 가족들 중 어쩌면 그 누구나 심적 혼란과 고통이 클 어머니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 영화의 제목인 '걸어도 걸어도'는 일본의 유명 엔카인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의 가사에서 따온 것인데 이 노래는 영화에서 어머니가 추억이 담긴 노래라고 굳이 LP판까지 찾아서 트는 노래다. 가족들은 이것이 그저 애틋한 추억의 산물인양 대하지만 사실 이 음악 뒤에는 다른 여인을 품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저 아무말 않고 뒤로 한채 돌아서야 했던 어머니의 사무치는 아픔이 서려 있는 노래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를 그저 지난 날의 작은 추억인 양 미묘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얘기한다. 수십년 간 품어온 그 아픔 때문에 이젠 눈물도 말라버린 듯 웃음으로 대신하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그래서 더 가슴을 무겁게 한다. 이뿐 아니라 10여년 째 기일마다 집을 방문하는 요시오(죽은 아들이 목숨과 맞바꿔 구했던)에 대해 '이제 그만 와도 되지 않냐'라고 묻는 아들에게 '이렇게 해서라도 벌을 주고 싶었다'며 조용히 하지만 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아득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억울하기까지 할 자식의 죽음 앞에 저항할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을 넘어서 체념의 길로 들어서버린 부모의 무기력한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일까.
분명 이 상황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감싸안는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가뜩이나 15년 전 소중한 가족 중 한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된 통증을 갖고 있는데, 그 아픔을 분명히 이해할 만한데 이 가족은 그 아픔을 서로 보듬어 주기보다 여전히 서로가 간직한 개인의 아픔을 호소하기에 바쁘다. 오히려 공통된 아픔으로 화합할 기회가 만들어지긴커녕 더 벌어지려고 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갈등같은 것 시작도 안한 것처럼 화해의 기미도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병들어버린' 가족을 애써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혹은 심지어 '이런 건 잘못됐다'고 고발하려 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저 놓아 둔다. 이것도 가족이라고, 아니 이게 가족이라고 얘기하는 듯 하다. 이것은 어쩌면 가족영화('가족용 영화'가 아닌 '가족에 관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의식 수준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를 기준으로 가족영화의 의식 수준은 크게 3단계로 나눌 만하다. 가장 낮은 1단계는 헐리웃의 흔하디 흔한 가족영화들이 고 수하는 '오로지 가족 중심주의'다. 가족은 아무리 큰 갈등이 있어도 무조건 화합하게 되어 있으며 삶의 목적은 결국 가족이라는(물론 추구해야 함은 분명하다), 현실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해피엔딩을 지닌다. 그 다음 2단계는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하는 깨어 있는 '풍자형'이다. 현대 가족이 갖고 있는 병폐들을 조명하고(물론 고쳐져야 한다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다음 3단계가 무리한 해피엔딩도 날이 선 풍자도 없는 '방관형'이다. 그 어떤 갈등이 꿈틀대고 있다 해도 그것에 대해 어떤 도덕적,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아마도 3단계에 속하는 영화일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갈등이 윤리적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아무튼 영화는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섣불리 평가하려 하지도 않고, 이것은 해결되어야 한다고 비판적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그저 일상인 거서처럼, 바라본다. 이러한 인식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지닐 수 있는 여러 형태가 그 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갈등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 판단하려 들지 않고, 어느 정도 인간 사회의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성숙한 형태의 인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핏줄이라는 무엇보다 강한 연결고리가 있긴 하지만 가족 역시 각기 다른 인격체가 모인 집단이니까.
영화는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가족들의 갈등에 좀처럼 개입하지 않는다. 앞에서 함께 지켜보다가 가끔 우리를 향해 뒤돌아보며 '참견하지 말아라'고 코멘트를 달아주는 듯 하다. 참견하지 않는 대신에 영화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없는 해답을 던진다. '이것이 가족이다'라고. 분명 위태롭고 바람직해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이것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가족의 한 모습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비단 가족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모습은 아니겠지만, 가족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격랑 중 하나일 뿐이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결국 관객은 가족들의 마음 속에 서려 있는 쓸쓸한 아픔을 함께 느끼며 아파 하다가도 이를 '가족으로서 겪는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늘 후회하고 늘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그것도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가족을 향한 가장 너그럽지만 한편으로 가장 용기 있는 시선을 지닌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 제목의 유래가 된 노래 가사처럼 우리가 원하는 '가족'이라는 곳에 '걸어도 걸어도 다다를 수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리 각자가 진정 원하는 '가족'이라는 곳을 향해 걷고 있지만 마치 제자리 걸음인 듯 그곳에 도달하기 힘든 이유는, 선문답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현재 머물러 있는 곳이 이미 '가족'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미 A라는 장소에 와 있는데 여기서 또 'A로 가야지'라고 할 수 없듯이, 어쩌면 이미 가족이라는 곳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에게 또 '가족이라는 목적지로 가야지'라는 말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수없이 부대끼고 다투고 화해하고 의지하고 보듬어주는 이곳이 이미 가족이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아츠시가 발견한 난파한 배처럼, 결국 현실의 가족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상적인 가족만 좇는다면 지쳐 쓰러질지도 모른다. 바다에 떠 있는 배가 육지를 향해 가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한없이 '진정한 가족의 길'을 찾아가지만, 어쩌면 진짜 가족이란 건 이미 우리가 들어서 있는 바다와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거친 파도와 따사로운 물결이 공존하는 곳 말이다. 그저 잡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봄으로써 <걸어도 걸어도>는 이 깊은 진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애틋하게 우리 가슴 속에 담아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