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또는 밀양... 그 어디든... ★★★★
혁신의 길이라니, 어쩌면 이 길은 1950년대 미국 뉴욕의 새롭게 떠오르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동네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뉴욕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집을 장만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지쳐가던 에이프릴은 프랭크에게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고심 끝에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프랭크는 주위에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며 이주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가지만, 직장에서 무심코 낸 아이디어가 채택되면서 승진의 기회를 잡게 된 프랭크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의 도입부를 짧게 장식하는 파티 장면을 돌이켜보면, 두 젊은 남녀는 미래에 대한 이상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곧바로 7년 뒤로 날아 온 현실은 말 그대로 팍팍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7년 전과 지금의 현실. 더 암울한 건 프랭크에겐 이제 더 이상 꿈을 실현할 아무런 의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프랭크가 알게 된 건,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듯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남들보다 특별난 것도 없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프랭크는 그저 잘리지 않고 적당히 월급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 해도 벅찬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보다 더 암울한 건 아내인 에이프릴의 눈엔 프랭크가 여전히 꿈과 이상을 좇는 존재로 비춰진다는 것이고, 그럴 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게다가 전업 주부인 에이프릴은 스스로도 뭔가 이뤄내고 싶은 희망을 꿈꾸고 있다. 에이프릴의 꿈과 프랭크의 각성은 사실상 화해할 수 없는, 또는 화해하기 힘든 대척점에 위치해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무능력을 자복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믿고 있었던 사람의 무능력함을 지켜봐야 한다. 이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따라서 프랭크가 승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둘의 대립은 파국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승진은 단지 그러한 기회를 좀 더 빨리, 좀 더 부드럽게 제공해 준 것이며, 프랭크에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해야 할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로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둘이 파리로 이주했다고 하면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가끔,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곳에선 내가 성공하거나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 곳은 나를 전혀 모르는 낯선 곳(밀양)이거나 어린 시절 동경하던 아름다운 곳(파리)이거나. 아무튼. 정말 새로운 곳에선 새로운 삶, 행복한 삶, 꿈을 이루는 삶을 이룰 수 있을까? <밀양>에선 그건 아니라고 말했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선 믿으려는 한 사람과 기피하려는 한 사람이 대립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 과정을 집중적이고 농밀하게 그려낸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 표현을 위해 마치 잔가지라도 되는 냥 아이들의 존재조차 거의 그리질 않았다. 한동안 이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줄 알았을 정도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소름끼칠 정도로 아찔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도 좋지만 연기로만 봤을 땐 케이트 윈슬렛으로 확실히 저울추가 기우는 듯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감독인 남편의 덕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마이클 새넌의 연기도 인상적이긴 하나, <버그>에서의 연기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음은 아쉽다.
마지막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부부로 출연한 영화를 보니, 아무래도 <타이타닉>이 떠오른다. 만약 디카프리오가 배에서 죽지 않고 둘이 결혼해서 살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결혼생활도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처럼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까? 아마 영화에서처럼 비극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타이타닉>에서 느꼈을 사랑의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찍 죽어 영웅이 되든가, 오래 살아남아 악당이 되든가’ -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이 대사는 곱씹을수록 참 기막힌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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